대한민국/6.25전쟁60주년

함께 지옥을 탈출했던 두 처녀… 60년 만에 할머니 되어 만나다

namsarang 2010. 4. 15. 23:38

[나와 6·25]

함께 지옥을 탈출했던 두 처녀… 60년 만에 할머니 되어 만나다

[21] 본지에 게재된 '박명자씨 탈출기' 계기… 취재팀이 만남 주선

"신문 읽는 순간 심장이 터지는 줄 …"
"압록강변 수수밭에서 탈출에 성공했을 때 둘이 얼마나 기뻤는지…"

"명자야. 맞구나, 너 명자 맞구나. 살아있었구나."

"언니,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찾았는데 이제야 만나네…."

지난 11일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선경아파트 15동 301호. 현관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심경애(83)씨 앞에 머리가 하얗게 센 박명자(78)씨가 나타나자 한순간 시간이 멎는 듯했다. 서로를 바라보던 여든살 안팎의 두 할머니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6·25 전쟁 때 두 사람은 서로 손이 묶인 채 인민군에 끌려가다 압록강변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해 12월 함께 서울로 돌아온 뒤 연락이 끊겼고,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 참으며 세상을 살아왔다.

두 사람의 만남은 본지의 '나와 6·25' 기획에 박씨의 탈출기(본지 4월 6일자 A8면)가 소개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사연을 읽은 심씨가 본지 특별취재팀에 연락을 해왔고, 취재팀은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심씨는 "신문을 읽는 순간,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마구 뛰어 터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스무살 안팎 풋풋한 여대생이었던 두 사람은 이제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가 됐지만, 꿈많은 소녀들처럼 끊임없이 얘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지난 11일 경기도 안산시 심경애(왼쪽)씨 아파트에서 심씨와 박명자씨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안산=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도망치다 붙잡힌 뒤 손 묶여… 결국 탈출 성공

두 사람은 인민군이 후방에 야전병원을 만들겠다며 의사·간호사들을 강제로 끌고 갈 때 함께 납북됐다. 박씨는 서울대 의대 부설 간호학교(현 서울대 간호학과) 학생 신분으로 서울대병원에서 국군을 돌보고 있었고, 심씨는 중앙대 보육학과(현 유아교육과)를 막 졸업한 상태였다.

심씨는 의료인력이 아니었는데도 인민군에 끌려갔다. 그는 "참 억세게 운이 나빴다"고 말했다.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그는 충무로에 있는 기숙사에서 여동생과 지내다 전쟁을 맞았다. 전쟁 통에 먹을거리가 떨어지자 혜화동 서울여의전(현 고려대 의대) 기숙사에 있는 친구에게 쌀을 얻으러 갔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끌려가던 두 사람이 함께 묶인 것은 1950년 늦여름이었다. 강원도 이천군을 지날 때쯤 박씨가 탈출을 시도하다 들켰고, 그때부터 인민군은 박씨와 심씨의 손을 묶었다. 박씨는 "언니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며 "아마 언니가 도망가지 않을 것 같아서 나를 함께 묶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심씨는 "나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면서 "그곳에서 우리 고향까지 거리가 불과 몇십리였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생각나는 일화가 나올 때마다 "그래 맞아"라며 맞장구를 치며 60년 전 기억을 되새김했다. 둘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순간은 압록강변을 지날 때 용변 보러 가는 척하며 수수밭 속에 숨어 탈출에 성공했을 때였다.

"우리가 사라졌다며 총에다 칼을 꽂아서 여기저기 쑤시니까 그냥 두 손 모아서 기도를 하는 수밖엔 없었잖아."(심씨)

"인민군들이 가고 나서 '언니 괜찮아요'하니까 '응'그래서 얼마나 기뻤는지…."(박씨)

둘은 탈출에 성공한 바로 다음날 쫓아오는 인민군 병사를 피해 민가의 아궁이에 숨기도 했다. 심씨가 "내가 그때 치마를 뒤집어쓰고 아궁이에 먼저 들어가고 네가 따라 들어왔어"라고 말했다.

서울엔 돌아왔지만…

그해 11월 평양까지 내려온 둘은 국군 8사단 정보부대에서 신원검증을 받은 뒤, 심씨의 고향집에서 한 달간 머무르다 서울에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보니 박씨는 아버지가 납북됐고, 심씨도 고등학생이었던 여동생이 행방불명이 됐다. 얼마 뒤 심씨에겐 또 다른 불행이 닥쳤다. 1·4 후퇴 때 평소 다니던 교회 목사님을 따라 거제도로 피란을 가면서,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영영 이별을 했다. 심씨는 "황해도 사람들 모임에서 우리 집이 폭격당해서 다 죽었다고 듣긴 했는데…"라며 울먹였다.

박씨는 1970~90년대 서울 무학여고 교사, 서울시교육청 장학사, 석관중 교장을 지낼 때 탈출 경험담을 바탕으로 안보강연도 많이 했다. 박씨는 "6·25전쟁을 북침이라면서 역사를 호도하는 사람들한테 어린 학생들이 휘둘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심씨는 유치원 교사로 일하던 중 목사와 결혼해 40년간 원주·횡성·제천·진해 등지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지냈다. 그러나 심씨는 박씨와는 달리 그동안 전쟁 때 겪은 일은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심씨는 "생전의 남편한테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면서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박씨는 1991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수여한 나이팅게일 기장(記章)을 받을 때 TV 인터뷰에서 "심경애 언니 꼭 연락주세요"라고 말했다. 중앙대를 찾아가 보육학과 졸업생 명부를 뒤지기도 했다. 박씨가 "TV에 나온 나를 못 봤던 거예요?"라고 묻자, 심씨는 "사는 게 바빠서 TV를 못 보고 살았어. 너는 꼭 다시 보고 싶었는데 이름밖에 모르니까 찾을 수가 있어야지"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 다 보청기를 하고 있어 간간이 대화가 끊겼다. 그럴 때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꼬옥 마주 잡았다.
 

 

세월도 전쟁도 못 갈라 놓은 '부부애'

 

6·25때 전사 호주장교 부인… "남편 곁에 묻히고 싶다"
오늘 부산 UN공원에 합장

세월도, 거리도, 전쟁도 그들의 사랑을 갈라 놓을 수 없었다. 60년의 세월, 수만리 거리를 넘어선 '세기의 부부애'가 14일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서 연출된다. 꼭 60년 전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된 호주군 장교의 부인이 이날 남편 곁에 묻힌다. 긴 세월도, 먼 거리도, 참혹한 전쟁도 어쩌지 못한 사랑이다.

6·25전쟁 때 전사한 호주군 케네스 존 휴머스톤 대위가 잠들어 있는 부산 대연동 유엔기념공원 내 묘역을 기념공원 관계자가 가리키고 있다. 2008년 세상을 떠난 휴머스톤 대위의 부인 낸시 휴머스톤씨 유해도 14일 오후 남편 옆에 묻힐 예정이다.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
2008년 10월 10일 세상을 떠난 휴머스톤 대위의 부인 낸시 휴머스톤(Nancy 부산유엔기념공원관리처는 "14일 오후 2시 영연방 4개국(영국·호주·캐나다·뉴질랜드)의 6·25 참전용사와 유가족 200여명이 유엔기념공원을 방문, 참배 행사를 갖는다"고 13일 밝혔다. 이날 행사엔 또 다른 '특별한 의식'이 포함돼 있다. 34살의 나이로 6·25전쟁에 참전했다가 1950년 10월 3일 전사한 호주군 케네스 존 휴머스톤(Kenneth John Hummberston) 대위 부부를 위한 것이다.

Hummberston)씨 유해가 이날 남편 옆에 묻힌다. 이는 호주에서 숨지기 전 휴머스톤 부인이 남긴 "유엔기념공원에 잠든 남편과 함께 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유엔기념공원관리처는 "휴머스톤 부인의 조카인 테리 홈스(Terry Holmes·61)씨가 부부 합장 요청을 해왔다"고 말했다. 휴머스톤 부인은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나 남편과 사별 후 재혼하지 않고 58년간 혼자 살아왔다.

유엔기념공원관리처는 "평생 사랑하는 남편을 가슴에 품고 살아온 휴머스톤 부인의 마음을 생각, 합장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들 영연방 4개국 참전용사 등의 유엔기념공원 참배는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 중 하나로 진행된 것이다.

한편 영연방 4개국은 9만4000여명이 6·25전쟁에 참전, 1750여명의 사망자를 포함, 81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세계에서 유일한 부산의 유엔기념공원에는 11개국 2300명에 이르는 유엔군 전몰장병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6.25전쟁에 참전했다 전사한 호주군 케네스 존 휴머스톤 대위가 잠들어 있는 부산 대연동 유엔기념공원 내 UN군 전몰장병 묘역. 2008년 세상을 떠난 휴머스톤 대위의 부인 낸시 휴머스톤씨 유해도 14일 오후 이곳 남편 옆에 묻힌다. /김용우 기자 yw-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