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너무 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찾았는데 이제야 만나네…."
지난 11일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선경아파트 15동 301호. 현관문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던 심경애(83)씨 앞에 머리가 하얗게 센 박명자(78)씨가 나타나자 한순간 시간이 멎는 듯했다. 서로를 바라보던 여든살 안팎의 두 할머니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6·25 전쟁 때 두 사람은 서로 손이 묶인 채 인민군에 끌려가다 압록강변에서 극적으로 탈출했다. 그해 12월 함께 서울로 돌아온 뒤 연락이 끊겼고,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꾹꾹 눌러 참으며 세상을 살아왔다.
두 사람의 만남은 본지의 '나와 6·25' 기획에 박씨의 탈출기(본지 4월 6일자 A8면)가 소개된 것이 계기가 됐다. 이 사연을 읽은 심씨가 본지 특별취재팀에 연락을 해왔고, 취재팀은 두 사람의 만남을 주선했다. 심씨는 "신문을 읽는 순간,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심장이 마구 뛰어 터지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스무살 안팎 풋풋한 여대생이었던 두 사람은 이제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가 됐지만, 꿈많은 소녀들처럼 끊임없이 얘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 ▲ 지난 11일 경기도 안산시 심경애(왼쪽)씨 아파트에서 심씨와 박명자씨가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다. /안산=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두 사람은 인민군이 후방에 야전병원을 만들겠다며 의사·간호사들을 강제로 끌고 갈 때 함께 납북됐다. 박씨는 서울대 의대 부설 간호학교(현 서울대 간호학과) 학생 신분으로 서울대병원에서 국군을 돌보고 있었고, 심씨는 중앙대 보육학과(현 유아교육과)를 막 졸업한 상태였다.
심씨는 의료인력이 아니었는데도 인민군에 끌려갔다. 그는 "참 억세게 운이 나빴다"고 말했다.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그는 충무로에 있는 기숙사에서 여동생과 지내다 전쟁을 맞았다. 전쟁 통에 먹을거리가 떨어지자 혜화동 서울여의전(현 고려대 의대) 기숙사에 있는 친구에게 쌀을 얻으러 갔다가 인민군에게 붙잡혔다.
끌려가던 두 사람이 함께 묶인 것은 1950년 늦여름이었다. 강원도 이천군을 지날 때쯤 박씨가 탈출을 시도하다 들켰고, 그때부터 인민군은 박씨와 심씨의 손을 묶었다. 박씨는 "언니는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었다"며 "아마 언니가 도망가지 않을 것 같아서 나를 함께 묶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 심씨는 "나도 도망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면서 "그곳에서 우리 고향까지 거리가 불과 몇십리였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생각나는 일화가 나올 때마다 "그래 맞아"라며 맞장구를 치며 60년 전 기억을 되새김했다. 둘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는 순간은 압록강변을 지날 때 용변 보러 가는 척하며 수수밭 속에 숨어 탈출에 성공했을 때였다.
"우리가 사라졌다며 총에다 칼을 꽂아서 여기저기 쑤시니까 그냥 두 손 모아서 기도를 하는 수밖엔 없었잖아."(심씨)
"인민군들이 가고 나서 '언니 괜찮아요'하니까 '응'그래서 얼마나 기뻤는지…."(박씨)
둘은 탈출에 성공한 바로 다음날 쫓아오는 인민군 병사를 피해 민가의 아궁이에 숨기도 했다. 심씨가 "내가 그때 치마를 뒤집어쓰고 아궁이에 먼저 들어가고 네가 따라 들어왔어"라고 말했다.
◆서울엔 돌아왔지만…
그해 11월 평양까지 내려온 둘은 국군 8사단 정보부대에서 신원검증을 받은 뒤, 심씨의 고향집에서 한 달간 머무르다 서울에 돌아왔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보니 박씨는 아버지가 납북됐고, 심씨도 고등학생이었던 여동생이 행방불명이 됐다. 얼마 뒤 심씨에겐 또 다른 불행이 닥쳤다. 1·4 후퇴 때 평소 다니던 교회 목사님을 따라 거제도로 피란을 가면서, 고향에 있는 부모님과 영영 이별을 했다. 심씨는 "황해도 사람들 모임에서 우리 집이 폭격당해서 다 죽었다고 듣긴 했는데…"라며 울먹였다.
박씨는 1970~90년대 서울 무학여고 교사, 서울시교육청 장학사, 석관중 교장을 지낼 때 탈출 경험담을 바탕으로 안보강연도 많이 했다. 박씨는 "6·25전쟁을 북침이라면서 역사를 호도하는 사람들한테 어린 학생들이 휘둘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심씨는 유치원 교사로 일하던 중 목사와 결혼해 40년간 원주·횡성·제천·진해 등지에서 목회활동을 하며 지냈다. 그러나 심씨는 박씨와는 달리 그동안 전쟁 때 겪은 일은 전혀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심씨는 "생전의 남편한테도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다"면서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박씨는 1991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수여한 나이팅게일 기장(記章)을 받을 때 TV 인터뷰에서 "심경애 언니 꼭 연락주세요"라고 말했다. 중앙대를 찾아가 보육학과 졸업생 명부를 뒤지기도 했다. 박씨가 "TV에 나온 나를 못 봤던 거예요?"라고 묻자, 심씨는 "사는 게 바빠서 TV를 못 보고 살았어. 너는 꼭 다시 보고 싶었는데 이름밖에 모르니까 찾을 수가 있어야지"라고 대답했다.
두 사람 다 보청기를 하고 있어 간간이 대화가 끊겼다. 그럴 때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손을 꼬옥 마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