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중공군은 "재래식 장비와 전술, 열악한 군수지원 체제로는 유엔군을 이길 수 없다"는 한계를 절감했다. 세계 최대의 인적 자원을 갖고 있다지만 공세 때마다 발생하는 엄청난 사상자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휴전을 가장 절실히 원했던 사람은 김일성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북한 피해는 견딜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밤낮없이 계속되는 유엔군 공습으로 북한은 한계상황에 몰렸다.
유엔군도 화력으로는 적을 압도했지만 38도선을 넘어 재차 북진할 때 소련의 개입과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 인명 피해와 비용 등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했다. 이제 "명예로운 휴전을 끌어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자유진영의 주축인 미국과 전쟁을 배후에서 조종했던 소련과의 막후 접촉에 따라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제1차 휴전협상 본회담이 열렸다. 당시 유엔군측은 "이르면 2주, 늦어도 4주면 협정 조인이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1개월짜리 전투중지 명령도 내렸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협상을 타결하기까지 무려 25개월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협상의 주요 의제는 ▲군사분계선 설정 ▲전쟁포로 교환 ▲휴전상태 감시기구 설치 문제 등이었다.
초기 쟁점은 어디를 군사분계선으로 할 것이냐였다. 양측의 팽팽한 대립으로 이 문제를 타결하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 공산군측은 '38도선'을 주장했고, 유엔군은 "해·공군 전력의 우세를 반영해 현재의 접촉선보다 '북쪽'에 설정돼야 한다"고 맞섰다. 한국인들도 전쟁 전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38선 정전'을 반대했다.
회담이 지지부진할 때마다, 유엔군측은 중공과 북한을 협상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공세를 취했다. 막강한 화력을 바탕으로 특히 중동부 전선에서 적을 38도선 북쪽으로 상당히 밀어올렸다. 개성을 둘러싼 신경전도 팽팽했다. 유엔군은 개성을 받는 대신 중·동부 지역 일부에서 후퇴한다는 방안을 제안했으나, 공산측의 반발로 포기했다.
결국 1951년 11월 27일 양측은 현재의 휴전선과 유사한 '접촉선'을 기준으로 군사분계선을 설정한다는 데 합의했다.
이어 양측은 협상의제 제3항인 '휴전 실시와 보장'에 관한 토의에 들어갔다. 그러나 유엔군측은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회담을 계속했다간 회담이 언제 종결될지 모른다고 판단, 남아 있는 모든 의제를 동시에 토의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제4항인 '포로문제', 제5항 '쌍방의 당사국 정부에 대한 건의' 등도 병행해서 토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