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共내전때 北韓 도움 받은 모택동
"만주에 우리 있으니 걱정마라" 남침 1년前 김일성에 派兵 약속
"60개사단 규모 무기 지원을" 모택동, 스탈린에 요청… 속셈은 낙후된 중공軍 현대화
모택동의 의도 알아챈 스탈린 "16개 사단 규모만 지원"
모택동이 6·25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1950년 10월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지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당시 중국은 경제 재건 등 내부적으로 시급히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이를 뒤로하고 6·25전쟁에 참여했다. 모택동이 자기 발등의 불도 아닌 남의 나라 전쟁에 뛰어든 것은 무엇보다 세계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일전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을 지원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도 대만을 감싸고 도는 미국과 싸우지 않고는 다른 지역의 사회주의 혁명은 고사하고 중국 혁명도 지켜내지 못한다고 봤기 때문이다.하지만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내전 당시 북한의 도움을 받은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참전 결정의 이유였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했을 때 만주지역은 무주공산이었고, 이 공백을 소련군이 메웠다. 모택동은 소련의 묵인하에 11월까지 당·정 간부 2만여명, 공산군 10만명을 만주로 진출시켰다. 하지만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기는 했으나, 공산군은 국민당 군(軍)에 비해 열세였다. 이때 만주 지역 거주 전체 조선인의 5%에 달하는 6만3000여명이 공산군 일원으로 모택동을 지원했다.
- ▲ 모택동이 1951년 1월 19일 팽덕회가 작성한 보고서에 가필한 메모. 중공·북한군의 단결을 촉구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침 결행 한 달여 전인 1950년 5월 중순, 북경의 모택동을 찾았다. 모택동은 "만약 미군이 전투행동에 참가한다면 중국은 북조선에 군대를 보내겠다. 소련은 미국과 38선에 대해 합의하였기 때문에 참전이 적절치 않지만 중국은 그런 약속과 관계없기 때문에 북한을 지원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고 했다. 김일성의 남침 개시에 앞서 중공군의 파병 가능성을 다시 확인해준 것이다.
6·25전쟁 초기 미국이 7함대를 대만해협에 배치한 것도 모택동을 자극했다. 미국은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것을 우려하여 함대를 배치했지만, 중국은 거꾸로 미국이 중국 본토에 침입할 것을 두려워했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과 한국군이 38선을 향해 진격하자 모택동은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1950년 10월 1일 스탈린의 중공군 파견 요청을 받은 모택동은 10월 5일 정치국 회의에서 일부 반대 의견을 누르고 '항미원조 보가위국(抗美援朝, 保家衛國)'[미국에 대항하는 조선을 도와서 사회주의 대가정과 국가를 보위한다]'의 명분을 내세워 출병을 결정했다. 하지만 형식은 중국 정부나 공산당 군대가 아니라 의용군인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支援軍)'이었고, 사령관은 팽덕회(彭德懷)였다.
- ▲ 모택동이 6·25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온 중공군 병사들을 환영하고 있다.
중국이 6·25전쟁에 개입한 얼마 뒤 모택동은 큰아들 모안영(毛岸英)을 전선에서 잃었다. 모택동과 두번째 부인 양개혜(楊開慧) 사이에서 태어난 모안영은 평안도의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번역과 비서 일을 하다가 11월 25일 미군기 폭격으로 죽었다. 2003년 나온 중국공산당의 공식 '모택동전'은 주은래가 모안영의 사망 소식을 한달이 넘게 지난 1951년 1월 2일 모택동에게 알렸다고 전한다. 모택동은 비통에 잠긴 채, "전쟁은 끝내 목숨을 요구하는구나"하고 탄식했다. 모안영은 북한 땅에 묻혔고, 지금도 북한을 찾는 중국 고위급 인사들은 모안영의 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6·25전쟁 참전을 중공군 현대화의 기회로 삼으려는 모택동의 의지는 소련과의 불화로 이어졌다. 중공군의 1차 공세를 성공적으로 이끈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36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무기를 요청했다. 이때까지 북한에 들어온 중공군 병력은 30개 사단이었다. 모택동은 이어 전쟁의 장기화를 명분삼아 100만명의 병력을 동원하는 3교대 순환제 전략을 수립하고 스탈린에게 60개 사단 규모의 무기 공급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그것이 순수 전쟁용이 아니라 중공군 현대화에 이용하려는 의도임을 간파했다. 스탈린은 1951년 16개 사단 규모의 장비만을 공급하고, 소련이 중국에 제공한 각종 대공화기는 북한에 넘겨주라고 지시했다.
무기 공급을 둘러싸고 불거진 중·소 갈등은 휴전협상에서 더욱 증폭됐다. 조기휴전을 원했던 모택동은 1951년 8월 13일 유엔군이 제시한 현 전선에서의 휴전안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그러나 전쟁을 통해 미국과 중국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던 스탈린은 강력하게 지속적인 전쟁을 요구하였다. 결국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뒤 미국 등 유엔군과 중국·북한 사이의 휴전협상은 급진전됐고, 그해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