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 헤스 前 美 공군 대령… 자국 돌아가서도 한국 드나들며 고아 돌봐
"6·25 후 한국서 딸 입양도… 美 정착한 이들 아직 연락… 통일되는 것 보고 싶어요"
21일 미국 오하이오주 데이톤시 외곽의 단층주택 초인종을 누르자 양복바지에 반소매 와이셔츠를 입은 노(老)신사가 나타났다. 93세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한 보이는 딘 헤스(Hess) 전 미국 공군 대령이다."건강한 모습의 6·25 영웅을 만나 기쁘다"고 하자 "한국정부가 초청해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장거리 여행을 할 정도까진 못 된다"며 웃었다. 헤스 대령은 걸음이 신중해지고, 등이 약간 굽었지만 1시간 넘는 인터뷰에도 지치지 않았다. 14년 전 부인이 사망한 후, 홀로 살지만 2년 전 발병한 암(癌)도 이겨냈다. 1956년 서울대로부터 받은 명예법학박사 학위증을 방 한 가운데에 소중하게 걸어놓을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다.
- ▲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미국 자택의 헤스 대령, 6·25 당시 전투기 조종석에 앉은 모습, 그리고 그가 수송기로 피란시킨 전쟁 고아들. /이하원 특파원
당시 공군 지휘부를 적극 설득, 15대의 C54 수송기를 동원해 무사히 피신시켰다. 이는 미 공군 전사(戰史)에 기록돼 미 국립공군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그는 이후에도 수시로 방한해 고아들을 돌봐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리기 시작했다. 특히 6·25 당시의 경험을 쓴 그의 책 '전송가(Battle Hymn)'는 유명 영화배우 록 허드슨(Hudson)이 주연을 맡은 동명(同名)의 영화로 만들어졌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왔어요. 제주도로 수송한 고아들 소식을 물어보니 '현재 머무는 건물을 비워줘야 한다'며 걱정하더군요. 새 건물 마련 비용이 6만달러였어요. 그 돈을 마련하려고 전송가를 쓴 겁니다." 그는 인세(印稅)와 영화화 수입 모두를 자신이 구해낸 고아들을 위해 썼다. 목사 출신인 그는 "고아들을 도우려는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이기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제주도로 수송한 고아들 가운데 나중에 미국에 정착한 이들과는 아직도 연락하며 지낸다"고 했다.
그는 1999년 마지막으로 방한, 전쟁고아를 거두었던 휘경학원 설립자 황온순 여사와 함께 초로(初老)에 접어든 고아들과 해후하기도 했다. 그가 전후(戰後) 한국서 입양한 딸은 현재 같은 도시에 살면서 아버지를 돌보고 있다.
헤스 대령은 6·25 발발 직후부터 1년간 250차례나 출격해 북한군과 직접 맞섰다. F51 무스탕기 조종 교육을 통해 불모지인 한국 공군을 성장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그는 "조국을 위해 미군이 감히 나서지 못하는 작전도 수행하려는 한국 공군의 불굴의 용기에 감명받았다"고 했다.
헤스 대령은 북한 주민의 고통에 대해서도 많은 말을 했다. 그는 "북한 주민들이 한국이 누리는 부(富)와 자유를 알지 못해 가슴 아프다"며 "이제 북한도 진정으로 타협하고 화해하려고 나서야 할 때"라고 했다. 또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역사를 제대로 알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 안 된다"고 충고했다.
인터뷰를 마치자 그는 "한국이 통일되는 것을 볼 때까지 살 수 있으면 좋겠다"며 기자의 손을 꼭 잡았다. 헤스 대령은 24일 미 국립공군 박물관에서 열리는 한국전쟁관 개관식 및 6·25 전쟁 60주년 행사에 참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