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참전용사 24명… '1·4 후퇴 격전지' 강원도 횡성 방문
"군인의 사명감으로 참전 희생자의 뜻 잊지 말길"
22일 오전 11시. 짙은 남색 베레모를 쓴 푸른 눈의 80대 노인 24명이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횡성 참전 기념공원' 언덕을 향했다. 노인들은 참전기념비가 서 있는 언덕 끝까지 땀을 흘리며 힘겹게 계단을 디뎠다. 그러면서 오를수록 탁 트여가는 사방의 지형을 기억을 더듬듯 꼼꼼히 살폈다.언덕 꼭대기에는 풍차를 형상화한 8m높이의 기념비가 있다. 노인들은 '풍차의 나라' 네덜란드에서 온 6·25 참전용사들이다. 강원도 횡성과 원주 일대는 6·25전쟁에 참전한 16개국 가운데 하나인 네덜란드군이 1·4 후퇴 때 중공군과 격전을 치렀던 곳이다.
"그때 전투할 때엔 이렇게 숲이 우거지진 않았는데…. 어디가 어딘지 알 수가 없네."
- ▲ 60년 전 UN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네덜란드 용사들이 22일 강원도 횡성군에 있는‘네덜란드군 참전 기념비’를 방문, 당시 숨진 전우들을 추모하며 경례하고 있다. /이재호 기자 superjh@chosun.com
1951년 2월 이곳 횡성 일대에서 네덜란드군 중대장으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레인더트 슈로더(schreuders·87)씨는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 직원의 부축을 받은 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네덜란드군은 병력 500명으로 물밀듯 밀려오는 중공군을 1951년 2월 5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넘게 이곳에 묶어두었다.
당시 한국군 소속으로 네덜란드 대대에 배속돼 함께 전투를 치른 곽경찬(77)씨는 "훗날 백선엽 장군이 네덜란드 대대가 아니었다면 1·4 후퇴 때 한꺼번에 대전까지 내줄 뻔했다고 말했다"며 급박했던 전황을 설명했다. 네덜란드 대대는 원주·횡성지구 전투에서 대대장 덴 아우덴 중령을 포함해 100여 명이 숨지거나 중상을 입는 손실을 입었다. 곽씨는 "네덜란드 대대와 중공군이 여기 횡성에서만 6번 넘게 육박전을 치렀다"며 "이들의 헌신이 아니었다면 1·4 후퇴 때 중부전선 전세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6·25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네덜란드 사람에게 한국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다. 요하네스 모트하겐(Motshagen·82)씨는 "참전 이전에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하멜이 표류해 간 나라라는 정도였다"며 "서울이 어디 있는지, 한국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사는지 전혀 몰랐다"고 했다. 단지 군인의 사명감으로 참전했다는 것이다. 모트하겐씨는"전쟁 때 정말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며 "그때 영양실조로 치아를 모두 잃어 이후 의치를 넣고 다니고 있다"고 했다.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반 머스(Meurs·87)씨는 "상관인 덴 아우덴 중령이 '함께 한국에 가자'고 했었고, 난 아무런 망설임 없이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했다.
주한 네덜란드 대사관의 한 직원은 "이런 희생에도 불구, 요즘 한국인들은 어떤 나라들이 유엔군으로 6·25에 참전했는지 제대로 모르는 것 같다"고 했다.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가 국민인식을 조사한 결과를 보아도, 유엔군 참전 사실을 알고 있는 응답자 가운데 81%가 참전국 수(16개국)는 모르고 있었다. 국가보훈처 하유성 과장은 "네덜란드를 비롯한 많은 나라가 국력을 다해 도와주었고, 앞으로 우리는 이들의 희생을 기리는 사업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