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위해 매일 떠난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많고 다양하다. 최 신부의 사상과 영성에 관한 글도 적지 않게 있다. 이 지면에 제대로 소개할 수도 없다. 나름대로 두 측면에 초점을 맞춰 최 신부의 삶을 오늘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지 성찰해 본다. ◇ 진리 위해 몸 바치다 #1.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가 중국인들이 누리는 만큼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집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고 있으면서도 이 진리를 추구할 방법을 찾지 못하여 자기들의 가엾은 처지에서 한숨짓고 있는 지극히 가련한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충청도 절골에서 쓴 여덟 번째 서한에 나오는 이 대목에서 특별히 두 가지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닫고 있다는 것이 하나이고, 진리를 추구할 방법을 찾지 못해 한숨짓고 있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왜 진리를 추구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가. 박해 때문이다. 그래서 최 신부는 같은 편지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주님,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바싹 말라버린 저희 땅에 당신 자비의 소나기를 퍼부어 주소서. 진리에 목말라 목이 타고 있는 저희에게 당신 구원의 물을 실컷 마시게 해주소서." #2. 최양업 신부는 11년 동안 해마다 7000리 길을, 그것도 외진 곳에 흩어져 있는 100곳이 넘는 공소를 찾아 사목순방을 했고, 마침내는 길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 신부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천주 신앙을 물려받으면서 이미 진리를 깨달았지만, 성장하는 과정에서 특히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마침내 사제가 되는 그 과정에서 진리를 더 깊이 깨닫고 체험했음이 틀림없다. 하느님 집에 대한 열정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화하셨듯이, 진리에 대한 열정에서 최 신부는 한 해도 빠짐 없이 7000리 길을 걸으며 5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다닐 수 있었다. 더욱이 최 신부는 동포들을 긍정적으로 여겼다. "조선 사람들은 쉽사리 합리적인 순리를 수긍하고 이성과 정의의 바른 길을 잘 파악합니다. 만일 한마음 한뜻으로 백성에게 동일한 이론을 가르치고 계몽한다면 백성들은 쉽게 동의할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계몽을 받아 이에 정통한 자가 되어 있지 않습니까? "(1857년 9월 15일 열네 번째 서한) 그러나 안타깝게도 박해로 인해 그 길을 제대로 추구하지 못하는 현실을 목도한 이상 최 신부는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그 진리를 전하고 나누는 일을 지체할 수 없었으리라. 진리에 대한 깨달음, 진리에 대한 사랑, 그것이 바로 '땀의 순교자'라고 불리는 최양업 신부를 지탱해 준 힘의 원천이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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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론 성지에 있는 최양업 신부 묘소에서 기도하는 순례객들 [전대식 기자 jfaco@pbc.co.kr] |
◇ 순례 영성 #3. 최양업 신부는 태어나서 6년 정도 다래골 새터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것이 한 곳에서 가장 오래지낸 시간이었다. 이후로는 줄곧 옮겨 다녔다. 가장 오래 있었던 마카오 신학교에서도 2년 이상 계속 머물러 있지 못했다. 이후 사제품을 받을 때까지는 물론 수품 후 국내에 들어와서도 최 신부는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언제나 길에서 살다 길 위에 진 순례자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나 순례자는 유랑자가 아니다. 유랑자 혹은 떠돌이는 최종 목적지가 없다. 그냥 흐르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떠돌 뿐이다. 그러나 순례자에게는 목적지가 있다. 순례의 길은 그 최종 목적지를 향한 도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순례자에게 그 도정이, 순례 여정 자체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순례자는 매 순간 순간의 여정에 더욱 충실해야 한다. 그 여정들이 모여 최종 목적지를 향한 도정 전체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의 삶은 바로 이런 순례의 삶이었다. #4, 최 신부는 인간의 최종 목적이 하느님 나라에 있고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과 일치가 결코 현세에서는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목자였다. 실제로 최 신부가 지은 '사향가' '선종가' '사심판가' '공심판가' 같은 천주가사들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교리들은 내세를 강조한 나머지 현세를 지나치게 경시하는 당시 천주교 일부 흐름을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최 신부는 누구보다 현실에 충실한 목자였다. 사나흘씩 걸어서 겨우 교우들을 만나고 한밤에 내쫓기다시피 피신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때로는 능욕과 모욕을 당하면서도 교우들을 찾았다. 몸이 힘들어 지탱하기 어려우면 나귀를 타고서라도 교우촌들을 순방했다.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착한 목자처럼(요한 10,11), 끝까지 자기 직무에 충실한 착하고 성실한 종처럼(마태 25,21), 최 신부는 길 위에서 쓰러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를 위해 이 땅의 수많은 양떼를 위해 자신의 직분을 최선을 다해 수행한 목자요, 종이었다. ◇ 그 혼을 되살려 사제의 해를 지내며 오늘에 되살려야 하는 최양업 신부의 혼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진리에 대한 열정으로 피어나고 그 열정을 사제직에 대한 열정으로 쏟아내는 삶이다. 하느님 나라에 목표를 두면서도 현실에 충실하는 삶, 현실에 충실하지만 결코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최종 목적지를 향해 날마다 길을 떠나는 삶이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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