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량 신부(상)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 갈매못성지. 103위 순교성인 중 다블뤼 안 주교, 위앵 민 신부, 오매트르 오 신부와 장주기 요셉, 황석두 루카 등 5위 성인이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곳으로 특히 석양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바닷가 순교성지다. 갈매못성지가 오늘날처럼 아름다운 순교성지로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80여 년 전 한 사제가 헌신적 노력을 기울여 갈매못 순교지를 확인하고 부지를 매입해 놓았기에 가능했다. 순교자의 후예임을 긍지로 삼고 평생을 산 정규량(레오, 1883~1952) 신부가 그다. 갈매못성지가 있는 오천은 서해안 천혜의 항구로, 조선시대에는 수군절도사가 주둔하던 수영이 있던 곳이고, 해변가 모래밭은 수군들의 훈련장이었다. 1924년 충남 부여 금사리본당 제3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 신부는 다음해인 1925년에 공주(현 중동)본당 최종철 신부와 괴산 고마리본당 현 공소 윤의병 신부와 함께 갈매못 순교 현장을 발견했다. 정 신부는 처형된 다섯 성인 유해를 몰래 파서 이장한 이들과 목격 증인의 증언 등을 바탕으로 성인들을 참수하던 자리, 머리를 걸었던 긴 깃대 자리, 임시로 매장한 구덩이 등을 확인한 후 땅 20평을 사들여 천주교 재단에 귀속시킨 것이다('갈매못성지' 누리방 약사에서).
순교자 직계 후손 답게 1913년 한국 천주교회에서 21번째 사제가 된 정규량 신부는 "내가 신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다 치명자들의 은혜요 선대 치명자 바오로의 전갈(傳喝)하심과 또 모친 엘리사벳께서 매괴(묵주기도) 5단을 드려주신 효험이 참으로 컸다"고 술회했다고 한다. 순교자들에 대한 정 신부의 열정과 신심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는 정 신부 자신이 또한 순교자의 직계 후손이라는 사실과 무관치 않다. 정규량 신부는 1883년 12월 17일 충주 용대(현 충북 충주시 동량면 용교리)에서 아버지 정의묵(야고보)과 어머니 남 엘리사벳의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정 신부는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바오로, 1804~1866)의 증손자였다. 정은은 원래 이천 단내(이천시 호법면 단천리)에서 살았고 그 집은 김대건 신부가 사목활동을 하던 1846년에 공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병인박해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면서 충주로 가게 된 것이다.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굳은 믿음을 가진 부모에게서 엄격한 종교교육을 받으면서 자란 규량은 당시 장호원(현 감곡)본당 부이용 신부 눈에 띄었다. 규량은 16살 되던 해 가을 부이용 신부 사제관에서 기거하며 예비신학생 교육을 받고 이듬해에 용산성심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정씨 집안에는 1896년 한국교회에서 세 번째로(사제 서열 4위) 사제품을 받은 정규하(아우구스티노, 1863~1953) 신부가 있었다. 정규하 신부는 정규량의 8촌 형이었다. 신학교에서 13년 동안 공부한 끝에 정규량 신부는 1913년 5월 17일 이기준(토마스, 1884~1977)ㆍ이종순(요셉, 1889~1935) 두 동기와 함께 사제품을 받았고, 바로 용인 압고지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미리내본당에서 분가한 용인 포곡면 압고지(현 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전대리)는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용인 지역 최초 본당으로서 용인과 광주 일대를 관할했다. 공소는 약 20개, 교우 수는 800여명이었다. 「용인 천주교회사」에 따르면, 정 신부는 음성이 청아하고 낭랑해 영성체 후에 기도를 바칠 때면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도 숨을 죽이며 경청했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키가 크고 준수해서 당시 신부들이 하던 대로 프랑스 모자를 눌러쓰고 말을 타고 공소를 순방할 때면 교우들이 10~20리 밖까지 나와서 영접했고, 외교인들은 '양대인'(洋大人)이 왔다며 구경하러 나오기도 했다.
생활개선과 교육에 힘써 정 신부는 압고지본당에서 11년간 사목하면서 신앙생활을 비롯해 생활 개선과 교육에도 각별한 신경을 쏟았다. 신앙생활과 관련해서는 특별히 고해성사를 강조해, 길을 가다가도 성사를 본 지 오래된 신자를 만나면 그 자리에서 '성사를 보라'고 재촉하곤 했다. '사람은 누구나 은총 상태에 있어야만 자기 영혼을 구할 수 있다'는 확고한 목자적 신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절대다수가 농민인 신자들의 열악한 생활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정 신부가 택한 대표적 방법은 양잠과 감자농사였다. 정 신부는 군청이나 면사무소에 가서 뽕나무 묘목을 얻어 신자들과 외인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고 재배법을 가르쳐줬을 뿐 아니라 직접 양잠과 감자농사를 지어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또 배우지 못한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지역 유지들과 의논해 성당 구내에 교실 2동을 짓고 삼성강습소를 운영했다. 도지사 인가를 얻은 삼성강습소는 군내 최초 현대식 초등교육기관이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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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규량 신부가 순교성지임을 확인하고 20평 부지를 매입해 기초를 놓은 갈매못 순교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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