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감동과 눈물을 안겨준 김연아 선수는 피겨 여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연기로 세계기록을 경신하며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2008년 '스텔라'라는 세례명으로 영세한 후 경기에 나설 때 십자성호를 긋고 경기장에 들어선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십자성호를 그으며 경기장에 들어서는 모습을 TV를 통해 볼 수 있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나타내는 십자성호는 가장 널리 알려진 상징으로, 이마와 가슴, 양쪽 어깨에 십자 모양을 긋는 것이다. 십자성호를 그으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바치는 성호경은 가장 짧지만 가장 중요한 기도문이다. 십자성호는 바로 십자가 죽음을 통해 인류를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동시에 가톨릭 신자임을 알리는 표시이기도 하다.
십자성호는 초기 사도시대 이래로 오늘날까지 교회에서 공적 전례를 거행할 때와 신자들이 사사로이 기도할 때 사용된다. 또한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식사 전후, 위험과 유혹이 있을 때에도 자유롭게 사용됐다.
본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탄생하시기 훨씬 전부터 여러 대륙, 많은 민족 사이에서 종교적 징표나 상징, 또는 장식으로 사용됐다. 그러다가 페르시아인들이 십자가를 처형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로마에서도 기원후 4세기까지 십자가형을 극형으로 사용했다. 로마 시민도 십자가형을 받았지만 특별한 경우에만 매우 드물게 시용됐다. 로마인들은 노예들이 살인이나 강도, 반역이나 반란 같은 죄를 저질렀을 때 십자가형에 처했다. 그래서 십자가형을 '노예 처형 방식'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처럼 십자가는 본래 처형 도구였다. 성경에서도 나무에 매달린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을 의미한다(신명 21,21-23). 따라서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치욕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느님은 신비롭게도 이 십자가를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 20,19).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하느님 뜻에 순종하셨다(필립 2,8). 십자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느님을 화해시키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는 도구가 된다(에페 2,13-16). 따라서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삶을 의미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이 십자가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신앙의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1코린 1,23-24). 이처럼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분의 구원 능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명백한 징표이다.
십자가는 초대교회 때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 무덤을 비롯해 기념비나 동전, 관공서 서류 등 곳곳에서 사용됐다. 그리스도교가 4세기 말 마침내 로마제국 국교가 되면서 십자가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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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성호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의 의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구원능력을 극적으로 보녀주는 명백한 징표가 된다. 김연아 선수가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십자성호를 긋고 경기장에 들어서는 모습. (SBS TV 캡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