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2) 입국로 탐사

namsarang 2010. 7. 21. 17:14

다시 돌아보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2) 입국로 탐사


그리움 가득 안고 떠난 귀향길, 그 멀고도 험한 길
   순교자 집안

▲ 김대건과 최양업이 신학공부를 하고 페레올 주교에게서 부제품을 받은 교우촌 소팔가자성당.




   김대건이 마닐라 롤롬보이에서 피란하며 공부하고 있을 무렵인 1839년 기해년 여름, 조선에는 박해의 칼날이 한창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 칼바람은 김대건의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 1796~1839)을 비켜가지 않았다. 당시 회장이었던 그는 사위 곽가를 앞세운 배교자의 밀고로 체포됐고,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로 순교 월계관을 받았다. 그해 9월 26일이었다.

 김제준이 붙잡혀 순교하면서 용인 골배마실(현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 대건의 집은 풍비박산이 났다.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다가 어렵사리 정착한 곳이 골배마실이었기에 타격이 컸을 것이다. 대건의 어머니 고 우르슬라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이집 저집 헤매는 신세가 됐다.

 그런 줄도 모르는 채 조선을 향한 뱃길에 오른 대건의 머릿속은 골배마실을 지나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솔뫼로 향한다. 대건이 태어난 곳은 솔뫼(현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였다. 집안은 김해 김씨 안경공파다. 김대건 집안이 언제부터 솔뫼에서 살았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증조부인 김진후(비오, 1739~1814)가 솔뫼에서 산 것으로 봐 적어도 그 윗대부터는 솔뫼에서 자리잡았을 것이다.

 김진후에게는 종현ㆍ택현ㆍ종한(안드레아)ㆍ희현 네 아들이 있었다. 맏이인 종현이 먼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동생들에게 전했다. 게다가 둘째 택현이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사촌누이 이 멜라니아와 혼인함으로써 김씨 집안의 천주교 신앙은 더욱 깊어졌다.

 대건의 증조부 김진후는 처음엔 천주교 신앙을 거부했다. 그러나 특히 맏아들의 거듭된 간청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고,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자 용감하게 신앙을 고백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곧 풀려났다. 이후에도 김진후는 너덧차례나 체포됐지만 그때마다 풀려나곤 했다.

 김진후는 그 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체포돼 배교하고 유배를 당했다가 곧 풀려났다. 그러나 1805년 다시 잡혀 해미옥에 투옥된다. 그는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면서 10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1814년 마침내 옥사한다. 집안의 첫 순교자였다. 솔뫼를 떠나 경상도 우련밭(현 경북 봉화군 재산면 갈산리)에서 신앙생활하던 셋째 아들인 한현도 1815년에 체포돼 이듬해 2월 대구 감영에서 참수 순교했다. 집안의 두 번째 순교자였다.

 이존창의 사촌 누이와 혼인한 둘째 택현은 1796년 차남 제준을 낳았고, 제준은 고 우르술라와 혼인해 1821년 아들 재복(再福)을 낳았는데 그가 김대건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박해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되자 택현은 가족들을 데리고 서울 청파동과 일명 광파리골이라고도 불리는 용인 한덕동(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을 거쳐 그 산너머에 있는 골배마실로 옮겨가 살았다.1827년쯤이었다.

 솔뫼에서 태어났지만 김대건에게는 솔뫼보다는 용인 한덕동과 골배마실이 더욱 기억에 떠오르는 곳이다. 명오(明悟)를 깨칠 나이 때부터 한덕동과 골배마실에서 줄곧 지내다가 유학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소년 대건은 증조할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의 순교 이야기를 들으며 믿음을 키웠을 것이다. 어쩌면 성소의 싹도 이곳에서 트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귀국로 타진

 망망대해를 거슬러 올라가는 에리곤호 위에서 21살 청년 신학생 김대건은 고향과 부모 형제들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바다에 토해내곤 했다.

 대만을 거쳐 북상을 계속하던 배는 1842년 5월 11일 상해 앞바다에 있는 주산도에 입항했다. 이곳에서 2개월을 더 체류한 후에 에리곤호는 상해 오송(吳淞)항에 정박했다. 그러나 가기로 한 조선을 향해서는 갈 낌새를 보이지 않는다. 결국 그해 9월 11일 김대건은 매스트르 신부를 따라 에리곤 호에서 하선했다.

 마카오를 떠난 지 7개월이 되도록 조선 근처에도 가지 못한 채 여전히 상해에 머물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지만 수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세실 함장을 따라 통역관으로 양쯔 강을 거슬러 난징(南京)까지 가서 영국과 청나라가 난징조약을 체결하는 현장을 참관할 수 있었다. 다시 오송항으로 돌아와서는 때마침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호를 타고 상해까지 온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과 조우한 것도 뜻밖이었다.

 이렇게 만난 네 사람 김대건과 최양업, 매스트르 신부와 브뤼니에르 신부는 중국배를 타고 다시 북쪽으로 향했다. 약 보름 만인 1842년 10월 22일 배는 요동반도 남단 태장하 해안가에 도착했고, 네 사람은 인근 백가점(白家店)이라는 교우촌에 들었다. 브뤼니에르 신부와 최양업은 다시 거처를 개주(蓋州) 양관(陽關) 교우촌으로 옮겨갔으나 김대건은 백가점에 머물면서 매스트르 신부에게 신학을 계속 배우며 조선으로 입국할 기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이곳 백가점에서 김대건은 다시 조선교회 소식을 전해 들었다. 기해박해로 선교사들과 신자들이 순교했다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매스트르 신부와 김대건은 조선 입국을 시도하려고 했다. 결행 날짜는 1842년 12월 20일로 잡았다. 그러나 연락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만주대목구장이었던 베롤 주교조차도 무모하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계획을 수정했다. 먼저 김대건이 조선 변문으로 가서 사정을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1842년 12월 23일 김대건은 중국 쪽 국경인 봉황성 변문을 출발, 4일 후 의주 변문 부근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대건은 청나라로 가는 사신 일행에 끼어 있던 밀사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조선교회 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자신을 신학교에 보낸 모방 신부를 비롯한 선교사 3명이 모두 순교했고, 동료 최양업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버지도 순교했으며 어머니는 의지할 곳 없이 떠돌아다닌다는 내용이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소식들이었지만 김대건은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매스트르 신부의 입국 가능성 여부를 타진했으나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듣고는 이튿날 자신이 직접 조선에 입국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의주 변문은 기지를 발휘해서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더 문제였다. 서울까지 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는 백가점으로 돌아왔다. 1843년 1월 6일이었다.

 그리고 그해 2월 하순 김대건은 제3대 조선교구장인 페레올 주교가 거처하던 만주 소팔가자(小八家자) 교우촌으로 옮겨 먼저 그곳에 와 있던 최양업과 함께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러면서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매스트르 신부의 명을 따라 변문으로 가서 조선에서 온 소식을 전해 받았다.

 그해 12월 31일 양관에서 거행된 페레올 주교의 주교 성성식에 참석하고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새로운 입국로 탐사를 준비한다. 이번에는 동북 지역을 통한 입국로 개척이었다. 당시 조선은 두만강변 국경 도시 경원에 2년 한 번씩 장을 열어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의 교역을 허락했다. 이를 경원개시(慶源開市)라고 했는데, 장이 서는 혼잡한 틈을 이용해 입국한다는 계획이었다.

 1844년 2월 5일 김대건은 중국인 신자 안내원 한 명을 데리고 눈덮인 소팔가자를 나무썰매를 타고 달려 장춘에 도착한 후 길림과 영고탑 부근을 거쳐 약 한 달 만인 3월 초 중국쪽 국경 도시 훈춘에 도착했다. 3월 9일 경원개시가 열리는 틈을 이용해 국경을 넘어간 김대건은 미리 와 있던 조선 신자들을 만나 동북 지역을 통한 선교사 영입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러나 쉽지 않다는 대답만 들어야 했다.

 다시 한 달간의 여행을 통해 소팔가자로 돌아온 김대건은 공부를 계속한 후 그해 11월 최양업과 함께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주교에게서 부제품을 받았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1075호 기사 중 마닐라를 거쳐 대만을 향해 출발한 날짜는 4월 20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