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지수

뮤지컬 의순 공주 및 제25회 회룡문화제(방과후 학교 페스티벌) 참관

namsarang 2010. 10. 9. 18:25

 

의순공주 뮤지컬 및

제25회 회룡문화제 (방과후 학교 페스티벌) 참관

(2010년 10월 9일 한글날에)

 

장소

뮤지컬(의순 공주) : 의정부 예술의 전당

제25회 회룡문화제 : 의정부시청앞 광장

 

의정부 예술의 전당

 예술의 전당 분수대에서

 

 

 

 

 

 뮤지컬은 2를 근간으로 하고 약간의 허구를 담아  전개되었다(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영상으로 담지 못해 아쉬웠다)

 

1. 의순공주와 [족두리산소와 정주당놀이]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서는 조선의 여인들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강요했다. 마침내는 왕족의 처녀들까지 그 대상에 포함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었다.

 

1650년 인조 효종 원년에 청나라 구왕은 조선의 공주에게 장가를 들겠다고 청혼을 해왔다. 이에 조정에서는 평민의 처녀를 골라 보내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훗날이 두려워서 임금님을 비롯한 대신 각료들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때 종실의 금림군 이개윤이 자기 딸을 청나라에 보낼 것을 자청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그녀를 의순공자라 칭하고 원두표, 신익전 등을 사신으로 시녀 열두명을 딸려 청나라로 보내게 되었다. 사랑하는 딸을 청나라의 제물로 보내는 금림군의 가슴은 터질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라에 충성하는 일편단심 그 하나 때문에 사사로운 가정의 평화만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의순공주도 이 길만이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그렇게 작별하고 의순공주가 집을 떠난 지 며칠 뒤에 평안도 정주땅 강변에 이르렀다. 정들었던 고향산천, 보고 싶은 부모형제, 이제 압록강을 건너가면 고국땅과도 영영 이별이라 생각하니 의순공주의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짐승만도 못한 오랑캐 나라의 구왕에게 아첨하며 욕되게 사느니보다 차라리 죽는 편이 낫겠구나 생각한 의순공주는 가마를 멈추게 하고 국가와 가문에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에 수행하던 노복들이 시신이나마 거두려 하였으나 찾지 못하고 족두리만 겨우 건져와서 의정부 금오동 금림군능 아래 장사를 지냈는데 이곳을 지금도 족두리 산소라 부른다. 그리하여 나라에서는 의순공주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큰당, 작은당, 각시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

 

한편 의순공주의 어머니는 이곳 큰당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저 멀리 북쪽의 정주쪽만 바라보며 애끊은 듯, 실신한 듯 딸을 찾았다하여 그 이름을 정주당이라 이름 붙였다 한다. 이 때부터 정주당제는 의정부의 민속놀이겸 동제로 전승되어 왔는데, 이른 봄 화창한 날을 골라 마을 사람들은 비명에 간 의순공주의 넋을 달래고 풍년과 무병 장수를 빌며 고사를 지낸다음 놀이를 벌이면서 하루를 즐겼다. 제수는 백미로 지은 밥과 생미역만으로 끓인국 뿐이었다.

 

제일이 되면 마을 주민들은 아침 일찍 당 앞에 모여 당제를 지내고 농기를 앞세워 꽹과리, 날라리, 북, 장고, 징들을 가지고 농악을 연주하며 횃불을 들고 천보산 능선을 여러차례 왕복하였으며 6.25동란 이후 당제만 지냈던 것이 1985년부터 민속놀이로 재현되어 주민의 화합과 전통을 다지고 있다.

 

 

2. 의순공주(효종의 딸) : 급조된 공주의 비극적 운명

 

섭정왕 도르곤이 조선에서 배우자를 구한다는 소문이 나자 국왕인 효종을 비롯하여 대부분의 종친이나 대신들은 딸을 숨기기에 바빴다. 사랑하는 딸을 지키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지만, 국가적으로 보면 나라의 위기를 외면하는 처사였다. 비변사에서는 대신들의 그런 행태를 꼬집어 “소나기가 올 때는 잠시 피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숨기려고만 하니 이는 왕을 속이는 짓이다” 하였는데, 사실 속이는 행위를 솔선한 사람은 국왕인 효종이었다.

효종은 국왕이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종친이나 대신들 중에서 누군가가 나서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라의 위기를 외면하려고만 했다. 결국 그 책임과 부담은 효종에게 돌아갈 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림군 이개윤이 자청하고 나섰다. 『효종실록』에 의하면 금림군 이개윤은 “딸이 있는데 자색姿色이 있다”고 스스로 말했다고 한다. 이런 행태에 대하여 사람들이나 기록에서는 금림군 이개윤이 “돈과 권력에 눈이 멀어 딸을 팔아먹었다”는 식으로 악평했다. 『연려실기술』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경인년(효종 1년, 1650)에 청나라 사람이 급히 와서 혼인을 청구하니, 조정에서 황겁하여 민가의 딸을 택하여 보내고자 하였지만 저들이 듣고 알까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금림군 이개윤이 자청하여 그 딸을 보냈다. 대개 그 뜻은 오로지 나라를 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청국에서 보내는 비단이 많음을 보고 탐낸 것이다. 이개윤의 집이 지극히 가난하였는데, 이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 딸은 의순공주라 하였는데, 섭정왕 도르곤이 받아 들였다가 뒤에 소박하여 버리고 그의 하졸에게 시집보냈더니, 이행진이 이개윤과 함께 사신으로 북경에 가서 글로 아뢰어 그 딸을 데리고 돌아오니 당시 사람들이 침을 뱉고 욕하였다. 이 내용에는 객관적 사실과 고의적 악평이 뒤섞여 있다. “경인년에 청나라 사람이 급히 와서 혼인을 청구하니, 조정에서 황겁하여 민가의 딸을 택하여 보내고자 하였지만 저들이 듣고 알까 두려워하였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내용 중에는 고의적 악평 또는 고의적 왜곡이 적지 않다.

도르곤 초상
어린 조카를 황제로 만들어 정권을 장악한 도르곤은 의순공주와 혼인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죽고 만다.

 

 

 

 

의정부시청앞 푸른숲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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