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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세의 의무’ 헌법이 무색하다

namsarang 2011. 2. 15. 23:21

[오늘과 내일/권순활]

‘납세의 의무’ 헌법이 무색하다

 

2009년 연말정산 기준으로 한국의 근로소득세 신고 대상자는 약 1429만 명이었다. 이들 중 40.3%인 575만 여명은 근소세를 전혀 내지 않았다. 2005년의 48.7%보다는 8.4%포인트 낮지만 10명 중 4명은 여전히 소득세가 남의 일이었다.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납세의 의무를 진다’는 헌법 38조가 공허할 정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의 면세자 비율은 대체로 20%대 수준이다. 조세연구원 성명재 연구위원은 “제대로 된 나라치고 우리처럼 면세 근로자가 많은 국가는 찾기 어렵다”고 단언한다. 유럽이 ‘복지 천국’이라지만 극빈층 외에는 수입이 적더라도 최소한의 소득세를 물린 뒤 거둬들인 세금을 복지 지출에 돌린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사의 교훈을 토대로 “넓고 얕게 세금을 거두는 세제(稅制)가 선정(善政)의 근간”이라고 강조한다. 이용섭 민주당 의원이 재정경제부 세제실장이던 2001년 ‘넓은 세원, 낮은 세율’을 역설하던 모습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세율을 낮춰 국민 부담을 덜어주는 것과, 소득세를 한 푼도 납부하지 않는 국민을 양산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고, 결과도 판이하다.

면세 근로자 비율은 1997년 32%였다. 그러나 정부와 정치권이 서민을 위한다면서 틈만 나면 면세점을 높이고 불요불급한 공제혜택까지 쏟아내면서 껑충 뛰었다. 선거의 계절에는 이런 풍조가 더 심했다. 총선이 있던 2000년 46.6%로 높아졌다가 이듬해 44.2%로 낮아졌지만 대선의 해인 2002년 48.5%로 다시 치솟은 것이 대표적 사례다.

2009년 근소세 면세점은 4인 가족 기준 1770만 원이었다. 보험료 교육비 등 특별공제를 감안하면 세전(稅前) 소득이 연간 2000만 원을 넘어도 소득세 치외법권 지대에 사는 사람이 꽤 있다. 서울시립대 임주영 교수는 “소득세 부담이 중산층 이상에 집중되면서 기존 납세자는 세금부담을 많이 느끼고, 새로운 정책을 펴는데 필요한 재원에 대한 조세저항의 여지도 그만큼 크다”고 진단한다.

 

세금을 둘러싼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위선적 행태도 심심찮게 발견된다. 한 조세전문가는 “우리 사회에는 공평과세와 복지혜택 확대를 주장하면서도 자신은 한 푼도 세금을 안 내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꼬집었다. “복지정책은 중산층 가치관이 필요한 때에 가난한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게 부추기는 역할을 했다”는 영국 저널리스트 윌리엄 리스모그의 탄식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여야 할 것 없이 복지 확대를 외치는 현실에서 ‘공짜 세금’만큼 솔깃한 구호도 드물다. 총선과 대선이 겹치는 내년이 가까워질수록 무책임한 주장은 더 기승을 부릴 것이다. 송광호 한나라당 의원은 이미 지난해 11월 “근소세 면세점을 연간 소득 4000만 원 정도로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호탄을 쏘았다.

종합소득세 대상자인 자영업자 면세자는 한때 50%에 육박했다가 신용카드 사용 확대 등의 영향으로 2009년 28.2%로 낮아졌다. 근소세 면세자도 점차 선진국 수준으로 낮춰갈 필요가 있다. 기존 면세점 인하가 어렵다면 우선 면세점을 동결한 뒤 소득 증가에 따라 소득세를 내는 국민이 늘어나도록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조세체계 왜곡을 부추기는 일부 정치인이나 관료의 세금 포퓰리즘을 응징하는 것은 납세자들의 몫이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