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기도만 하면 되나요? 남편은 어릴 때 세례를 받았지만 주일에 성당에 가는 것을 귀찮아했고, 집에서 아이들과 같이 기도하자고 해도 딴짓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떤 기도모임을 다녀오더니 갑자기 변해서 매일같이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남편의 그런 모습이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는데 시간이 가면서 '문제가 생겼구나'하는 것을 느낍니다.
남편은 뭔가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온종일 성당에서 기도만 합니다. 제가 잔소리를 하면 '주님께서 다 해결해주실 텐데 왜 그리 믿음이 약하냐'고 오히려 저를 나무랍니다. 결국 남편이 꼼짝을 안 하는 바람에 제가 나서서 어렵게 문제 해결을 하곤 하는데 남편은 칭찬 한마디 없이 "거봐라, 주님이 다 해결해주시지 않느냐"하면서 얄미운 소리만 합니다.
성당에서는 남편을 두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칭찬이 자자한데 같이 사는 저는 속이 터져 죽을 지경입니다. 남편이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면 제가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요? A. 자매님 속이 터지실 만하겠습니다. 사람 마음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심리적 전략이 있습니다. 이것이 심리학 용어로 '방어기제'라고 합니다. 이 방어기제는 아주 고급스러운 것부터 미숙한 것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남편분은 방어기제 중에서 미숙한 것에 속하는 '부정'이란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정이란 무엇인가? 속된 말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이들 중에는 '자기가 눈을 감으면 아무도 자기를 보지 못할 것이다' 혹은 '나쁜 일이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하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있는데 어른 중에도 아이들처럼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신앙인 중에 기도하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신다고 하면서 오로지 기도에만 매달리는 분들이 이 경우에 해당됩니다.
부정이란 방어기제의 문제점은 오래 사용할 수 없고 도움 되는 기간이 짧다는 것입니다. 삶의 현실은 계속해서 눈을 감고 살 수가 없는데도 부정이란 방어기제를 지속적으로 사용하면 '실없는 사람' 혹은 '실성한 사람' 취급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또 부정을 너무 오래 사용하면 문제 해결에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부정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마치 귀를 막은 채 "안 들려! 안 들려!"하고 외치는 아이들 마음과 유사해서 주위분들 충고를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문제 해결 시점을 놓쳐버리고 자기 인생을 그르치게 됩니다.
부정이란 방어기제는 신앙생활에서 아주 묘한 결과를 낳거나, 옳고 그름을 구분하기 어렵게 할 때가 많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음에도 기도에만 매달리는 것을 신심이라고 해야 할 지 부정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지 식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전력을 기울이지 않고 눈 감고 아웅하는 식으로 기도만 하는 것은 신심행위가 아니라 가장 미숙한 방어기제인 부정을 사용하기에 은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마태오 복음 17장이 좋은 사례가 될 듯합니다.
주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 변모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가 집을 세 채 지어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무런 응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면 베드로가 주님께 수난의 길을 가지 말고 그냥 편하게 살자고 제안하는 부정이란 방어기제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부정이란 방어기제를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정의 기능 중에는 정서적 차단 기능이 있습니다. 전류가 과도하게 흐르면 차단기가 내려가 안전한 상태를 유지하듯 정서적으로 과부하가 걸리면 부정이란 방어기제가 작동해 심리적 무너짐을 막아줍니다.
예를 들어 아주 친한 친구가 갑작스럽게 죽고 나면 주위 사람들이 충격을 받고 '나도 저렇게 죽겠구나'하는 생각으로 우울하고 불안한 마음에 일상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부정이란 방어기제를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오래 살거야'하는 생각을 하면 심리적 무너짐을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정은 초기 충격을 완화하고 심리적 균형이 회복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잠정적이고 일시적 수단일 뿐 남편분처럼 늘 부정이란 방어기제를 사용하면 시간이 갈수록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따라서 문제가 생겼을 때 자매님이 나서서 짐을 지지 마시고 어떻게든 기도를 부정이란 방어기제로 사용하려는 남편을 현실로 불러내서 문제에 직면하고 해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안의 모든 문제를 자매님 혼자 다 머리에 이고 가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홍성남 신부(서울 가좌동본당 주임) / cafe.daum.net/withdob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