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리카르도 팜푸리(St. Richard Pampuri) - 5월 1일
1897-1930, 이탈리아 출생 및 선종, 의사, 수사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Richardus Pampuri, 또는 리카르도)는 1897년 8월 12일 이탈리아의 파비아(Pavia) 근처 트리볼지오(Trivolzio)에서 태어났다. 안젤라 팜푸리(Angela Pampuri)와 인노첸테 필리포(Innocente Filippo)의 11남매 중 10번째 태어난 에르미니오(Erminio)는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었다. 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인근 마을에 사는 이모 집에 맡겨졌는데 7년 후인 1907년에 아버지 또한 밀라노(Milano)에서 돌아가셨다. 그는 인근에 있는 두 곳의 초등학교를 다녔고 밀라노로 가서 중학교를 마쳤다. 그리고 파비아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915년 파비아 대학의 의대에 들어갔다. 그는 1915년과 1920년 사이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하사관과 의무병으로 근무했다. 1921년 7월 6일 파비아 대학의 약학과와 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의사로 있던 삼촌 밑에서 3년간 의료 실습을 마친 후 밀라노의 한 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환자들을 돌보던 그는 그리스도교 사도직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사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선교사제가 되고 싶었지만 건강 문제 때문에 단념했었다. 젊은 시절 어느 곳을 가던지 그리스도교적 덕행의 모범이었던 그는 세상 속에 살면서도 복음의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고백하고 너그러움과 열정을 갖고 자선사업을 실천했었다. 바쁜 일정 중에도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열심히 미사에 참례하고 성체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으로 하루에 한 번 이상 묵주기도를 바쳤고, 파비아 대학 가톨릭 액션 단체의 근면한 회원이었으며,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와 작은 형제회의 3회원으로도 활동했다.
소년 시절부터 가톨릭 액션 단체에 참여했던 그는 실습을 위해 모리몬도(Morimondo)에 갔을 때 본당 신부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음악 밴드와 가톨릭 액션 젊은이 단체를 조직하여 그 첫 번째 대표로서 성 비오 10세(Pius X)의 전구 아래 두 단체를 두었다. 그는 또한 본당의 선교 후원회의 간사를 맡기도 했고 자비를 들여 청년 모임과 농민과 지역 노동자들을 위한 정기 피정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의사로서 유능하며 자비로운 그는 환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의술을 베푸는 데 있어서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약과 돈 그리고 음식과 이불을 가져다주곤 하였다. 그의 자선사업은 모리몬도 근교의 도시 근로자들과 이웃의 손길이 필요한 노인들에게 퍼져나갔고 다른 마을과 도시로도 확산되었다.
6년 동안 의사로 일한 그는 수도원에 입회하고자 했고, 이에 ‘거룩한 의사’를 잃을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슬픔은 말로 다 할 수 없이 컸고 지역 신문에서까지 기사화하였다. 그는 결국 1927년 6월 22일 밀라노의 천주의 성 요한 수도회에 입회하여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자신의 의학기술을 지속하고 동시에 복음적 거룩함에 더 가까이 가는 길을 택하였다. 그는 리카르두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브레시아(Brescia)에서 지원기를 마치고 1928년 10월 24일 서원을 하였다. 서원 후 그는 노동자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브레시아의 천주의 성 요한 병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그곳에서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 수사는 아름다운 자선을 실천하여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았다. 수도자로서 그의 삶은 수도회에 입회하기 전에도 그랬듯이 동료, 환자, 의사, 진료 보조원, 간호사, 그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덕과 자선의 탁월한 모범이었다.
성 리카르두스 팜푸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을 때 얻은 병으로 인해 일종의 폐병을 앓고 급속히 건강이 악화되었다. 밀라노로 치료를 받으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030년 5월 1일 33살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는 ‘자신의 전문지식을 자비의 사명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아는 의사로서, 자신 안에 천주의 성 요한의 진정한 아들로서의 카리스마를 살았던 수도자로서의 기억을 남기고’ 하느님께로 돌아간 것이다. 그의 시신은 고향에 돌아와 묻혔으며 그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졌다.
그는 1981년 10월 4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는데 이날 강론에서 교황은 이렇게 말하였다. “짧지만 열정적인 삶을 산 리카르두스 팜푸리 수사는 모든 하느님 백성에게 자극이 되는데 특히 젊은이와 의사, 수도자들에게 큰 자극이 된다. 그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인생을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기쁘고 용기 있게 살도록 초대하며, 항상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가르침을 따라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에 스스로를 헌신하도록 초대한다.” 그는 1989년 11월 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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