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최양업, 13년 만에 홀로 조선 땅을 밟다
제1부 글 싣는 차례
① 미지의 땅 마카오로 떠나다 ② 조선 땅 배티로 돌아오다 ③ 조선 5개도를 본당사목구로 ④ 교우촌으로 향하는 길 위에 서다 ⑤ 12년, 짧고도 긴 순례 여정을 마치고
#1842년 7월 17일. 최양업은 선교사 브뤼니에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호를 타고 마카오를 떠난다. 1차 귀국로 탐색이었다. 당시 철학과정을 마치고 신학과정에 들어가 있던 최양업은 그해 8월 말 상하이에 도착, 5개월 앞서 조선으로 향하다가 상하이에 머무르고 있던 김대건과 반갑게 상봉한다.
그러나 조선으로 돌아가는 귀국 길은 여전히 막막했다. 파보리트호도, 에리곤호도 조선으로 가지 않았다. 1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청이 영국측에 강화조약을 제안, 난징조약을 맺으면서 프랑스도 청과 통상조약을 맺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굳이 조선까지 항해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프랑스 군은 두 신학생을 하선시켰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장난(江南)대목구장 베시 주교 주선으로 중국 배를 타고 상하이를 출발해 랴오뚱반도 남단 타이좡허(太莊河, 현 좡허시)에 도착한다. 그곳 교우촌에서 유숙하던 최양업 일행은 가이저우(蓋州)시 양구안(陽關)을 거쳐 조바자츠(小八家子)에 이른다. 현재의 지린성 창춘시 허룽진 조바자츠향이다. 최양업은 그곳에서 신학공부에 전념하며 조선으로 떠날 날을 기다렸지만 그 기간이 무려 7년이 넘게 걸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조바자츠서 부모 순교소식 접해
"우리는 이 모든 쓰라림을 하느님을 위해 참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위로이시요, 우리의 희망이시며, 우리의 원의이시니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고 그분 안에서 죽습니다."(마카오에서 쓴 최 신부의 1842년 4월 26일자 서한)
스물두 살 청년 최양업의 '북방행로'를 따라간다. 옥수수로 뒤덮인 평원은 조선 청년의 '의롭고 뜨거웠던' 열정을 기억하고 있을까. 18세기 말 중국 산둥성과 허베이성 이주민들이 들어오면서 창춘(長春)으로 개칭돼 19세기 중반 만주 핵심도시으로 성장하던 지역에 최양업이 찾아들었다. 창춘시에서 서북쪽으로 28㎞ 가량 떨어진 조바자츠였다. 1842년 11월이다.
교우촌 조바자츠는 최양업이 사제성소를 지켜가는 데 더없이 따스한 울타리였다. 페레올 신부가 거처하던 교우촌인데다 인근에 성모성심회 수녀원도 있어서 더없이 편안하고 아늑했다. 당시 조바자츠본당 총회장 아들인 띵밍리(丁明禮, 안드레아) 신학생 집에 머물며 중국어와 중국 문화를 익히고 기도와 신학공부에만 오롯이 매달렸다.
조선에선 비보가 날아들었다. 1843년 3월 조바자츠에 도착한 김대건에게서 최양업은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과 어머니 이성례(마리아)가 1839년과 1840년에 잇따라 순교한 소식을 접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이 그를 엄습했다. 그럼에도 그 깊은 슬픔을 곱씹으며 최양업은 매일미사와 기도, 신학공부에만 몰두했다.
기쁨도 찾아왔다. 자신에게 신학을 가르쳐주던 페레올 신부가 1843년 조선대목구장에 임명돼 그해 12월 가이저우시 양구안 성당에서 주교서품식이 거행된 것이다. 이어 1년 뒤인 1844년 12월 조바자츠에서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그리도 원하던 부제품을 받는다. 첫 한국인 부제의 탄생이었다. 1836년 1월 말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훈춘(琿春)으로 떠나기까지 조바자츠에서의 3년 3개월은 41년의 짧은 삶을 살다간 최양업에게는 드물게 행복했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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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이 부제품을 받은 조바자츠(오른쪽) 성당과 교우촌. 지금도 이 마을 주민 3000여 명 가운데 98%가 신자다. |
2차 귀국로 탐색은 의주에서 훈춘으로 바뀌었다. 1846년 1월 만주의 칼바람을 안고 최 부제는 꺼지지 않는 선교 열망을 안고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800㎞에 이르는 '북방행로' 개척에 나섰다. 조바자츠를 출발해 창춘→쑹화쟝(松花江) 동쪽 하류 지린(吉林)시→헤이룽장성(黑龍江省) 무단(牧丹)강 중류 닝안(寧安)→조ㆍ중 국경 훈춘(琿春)에 이르는 한 달간 여정이었다. 때론 만주식 썰매를 타고, 때론 마차로, 때론 걸어서 혹한 삼림과 호수ㆍ사막을 거치는 여정 끝에 최양업은 훈춘에 이르렀다.
최양업 일행이 목표로 삼은 건 '경원개시'(慶源開市)였다. 조선이 허가한 동북방 공식 무역시장인 경원개시를 틈타 입국한다는 계획이었다. 훈춘 인근 마을에서 경원개시를 기다리던 일행은 그러나 만주 관헌에게 체포됐다가 사흘 만에 석방된다. 이에 낙담한 일행은 다시 조바자츠로 귀환해 신학생들을 지도한다.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번역
1년 만에 최 부제는 다시 조선에 입국하고자 그해 12월 말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의주와 인접한 비엔먼(邊門)으로 향했다. '고려문' 혹은 '책문(柵門)'이라고도 불린 비엔먼은 평북 의주로부터 48㎞ 떨어진 지역으로, 대체로 명나라 말기에 조선과의 국경으로 굳어져 조선과 중국 간 교역이 이뤄졌다.
이곳 비엔먼에서 김대건 신부 순교와 함께 병오박해 소식을 들은 최 부제는 이듬해 초 홍콩으로 옮긴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출발한다. 그리고 홍콩에서 페레올 주교가 프랑스어로 기록한 「기해ㆍ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Acta Martyrum)」을 라틴어로 번역한다. 여기에는 기해년(1839년) 순교자 73위와 병오년(1846년) 순교자 9위 등 총 82위의 행적이 담겨졌고, 이 가운데 79위가 훗날 시성된다.
최 부제의 조선 귀국로 탐색은 계속됐다. 1847년 7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군함을 타고 다시 조선으로 향한다. 제4차 귀국로 탐색이자 해로로는 첫 탐색이었다. 군함은 그해 8월 고군산군도(현 군산시 옥도면)에서 난파해 섬에 상륙했다가 상하이로 돌아온다.
상하이로 돌아온 뒤 최 부제는 예수회 신학원에서 공부를 하게 된다. 그리고 1849년 4월 15일 예수부활대축일 이후 첫 주일인 사백(捨白)주일에 상하이에서 나폴리성가회원인 장난대목구장 마레스카 주교 주례로 사제품을 받는다.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였지만, 김 신부가 앞서 순교했기에 다시 유일한 조선인 사제가 된다.
당시 서품식이 거행된 장소는 아직 논란이 많다. 기존엔 상하이 사쟈후이(徐家匯) 예수회신학원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왔지만,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조현범(토마스) 박사는 2008년 12월 「교회사학」지에 '중국 체류 시기 페레올 주교의 행적과 활동'이라는 논문을 통해 창카레우(張家樓) 성당으로 추정될 수도 있다고 밝히면서 창카레우성당이라는 설이 유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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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양업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성당으로 추정되는 상하이 창카레우성당. 지금은 상하이 시내로 옮겨왔지만, 당시엔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성당인 진자샹 성당과 함께 푸둥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
양업교회사연구소장 차기진(루카) 박사도 창칼레우 성당이 최 부제 사제서품식이 거행된 장소라는 데 무게를 둔다. 차 박사는 "사쟈후이 성당은 최 부제가 사제품을 받은 뒤 뒤늦게 건립됐고,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진자샹(金家巷) 성당도 마레스카 주교가 당시 주교관을 퉁자다오(董家渡) 성당으로 옮겼기에 최 부제가 사제품을 받은 성당일 가능성이 희박해 당시 상하이 푸둥(浦東)에 있던 창카레우 성당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밝힌다.
사제품을 받자마자 그해 5월 두 번째 해로 탐색을 겸해 5차 귀국로 탐색에 나선 최 신부는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백령도를 돌아보고 상하이로 귀환한다. 이어 랴오닝성 좡허시 차쿠성당으로 가서 훗날(1854년) 주교품을 받고 조선대목구장이 되는 베르뇌 신부를 보좌, 중국인 사목에 나선다. 이로써 차쿠 지역은 한국인에 의해 이뤄진 첫 해외선교지가 됐고, 첫 번째 한국인 해외선교사는 최 신부로 기록됐다.
#베르뇌 신부 도와 중국인 사목
최 신부가 차쿠에서 사목한 기간은 대략 7개월 가량이다. 1849년 5월 말에서 12월말까지다. 당시 활동상이 최 신부의 1850년 10월 1일자 서한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1849년) 5월에 함선을 타고 상하이를 떠나 다시 랴오뚱에 왔습니다. 이 지역에서 7개월 동안 머물며 만저우(滿洲)교구장 직무대행이신 베르뇌 신부님 명령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주일과 축일엔 신자들에게 짧은 강론을 하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대축일엔 고해성사를 주며 성체를 모시도록 하는 일에 정성을 다 바쳤습니다." 이 내용은 최 신부가 한국인 성직자로는 최초로 중국 땅에서 중국 신자들을 대상으로 사목을 수행한 첫 번째 해외선교사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1849년 12월 말, 최양업 신부는 또 다시 '비원(悲願)의 땅' 비엔먼(邊門)에 이르렀다. 그동안 몇 차례나 힘겨운 여정을 거쳐 찾아왔던 입국 관문이었다.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였지만, 이방 사제는 국경을 지키는 조선 병사들의 이목을 피해 들어가기가 어려웠기에 매스트르 신부는 아쉽게도 입국하지 못했다. 이윽고 의주가 눈에 들어오고, 최 신부는 혼자 조선 땅에 발걸음을 내딛는다. 여섯 차례에 걸친 입국 탐색 끝에 이뤄진 결실이었다. 13년 만의 귀국이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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