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상 공경' 교회전통 확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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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케아 성 소피아 성당에서 개최된 제2차 니케아 공의회 모습. 가톨릭대사전 자료사진 |
개최와 과정
니케아는 462년 전인 325년에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느님이 아니라고 하는 아리우스 이설을 단죄하기 위해 첫 번째 세계공의회가 열린 도시였습니다. 다만 460여 년 전과 달리 공의회가 소집된 장소는 궁전이 아니라 그 동안 새롭게 세워진 성 소피아 성당이었습니다.
787년 9월 24일 교황 하드리아노 1세가 파견한 사절들을 포함해 약 300명의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타르시우스가 공의회 개회를 선언합니다. 참석자들에게 발언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이레네 황후의 편지가 낭독되고 회의에 참석한 성화상 파괴주의자 주교들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이 논의는 3차 회의에 가서 결말을 보는데 해당 주교들은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로 규정한 754년 회의 결과를 포기하고 그 회의를 단죄한다는 조건으로 공의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됩니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는 약 3주 동안 8차 회의로 진행됐습니다. 마지막 8차 회의를 제외하고는 모두 성 소피아 성당에서 열렸습니다.
제2차 회의(9월 26일) 때는 교황 하드리아노 1세가 보낸 편지가 낭독됩니다. 교황은 이 서한에서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들이 성화상 공경은 우상숭배라는 비난에 맞서 흔들림 없이 성화상 공경의 전통을 지켜왔음을 강조합니다. 또 성전 계약궤에 커룹을 만들라는 말씀(탈출 25,18-19 참조)과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두라는 말씀(민수 21, 8 참조)을 성서적 근거로 내세우지요. 교황 편지가 낭독된 후 교황사절들은 타르시우스 총대주교를 비롯한 모든 참석 주교들에게 교황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는 일종의 신앙 서약을 요구합니다. 또 회의장에 참석해 있던 수도승들에게도 같은 서약을 요구하지요.
제4차 회의(10월 1일)와 제5차 회의(10월 4일)에서는 성화상 공경과 성화상 제작 및 설치의 정당성에 대한 성경의 근거와 교부들의 증언을 제시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다뤄집니다. 제5차 회의가 끝날 때는 교황사절들의 제안에 따라 소피아 성당에 성화상을 안치하는 장엄한 예식이 열립니다.
10월 6일 열린 제6차 회의에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부근 히에레이아에서 754년에 열렸던 회의를 단죄합니다. 754년 회의의 교령이 낭독되고 그에 대한 반박이 조목조목 길게 이어집니다. 아울러 754년 회의는 교황이 대표하지 않았기에 세계공의회가 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또 754년 회의에서는 성화상 공경을 우상숭배로 규정함으로써 교회가 우상 숭배에 빠진 것처럼 여겼지만 그리스도의 교회가 우상 숭배에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제7차 회의는 10월 13일 열렸는데 성화상 논쟁을 종식시키는 교리적 선언문이 작성됩니다. 제1차 니케아 공의회의 신앙고백문을 시작으로 앞선 공의회들의 신앙고백문들을 선포하고 과거의 모든 이단들을 단죄합니다. 단죄된 이단 가운데는 교황 호노리오 1세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삼장서는 들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에 성화상을 만들어 공경하는 관습의 정당성과 그 근거를 제시합니다. 중요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생명을 주는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성화상들에 대해서도, 교회 안에서, 성구와 의복에도, 벽에도, 개인집이나 길가에도 다양한 형태로 설치할 수 있다…성화상들을 자주 바라봄으로써 우리 마음은 성화상들이 표상하는 이들에 대한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한다. 우리는 그 성화상들에 공경의 예를 표하지만 그러나 진짜 흠숭을 드리지는 않는다. 흠숭은 우리 신앙이 가르치는 대로, 오직 하느님께게만 해당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거룩한 십자가와 복음서와 성인 유해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성화상들에 향을 치고 촛불을 드릴 수 있다…그러므로 이와 다르게 생각하거나 가르치려는 자, 또는 교회의 이 전통을 일축하려는 자는…그들이 사제나 주교라면 그 직에서 쫓겨날 것이며 수도자나 평신도라면 파문될 것이다."
공의회 교부들은 이 선언문 작성에 이어 교회 생활 규율에 관한 22개 규정도 제정합니다. 몇 가지를 살펴보면 △세속 권력은 주교와 사제, 부제를 임명하지 못한다 △주교는 수하 성직자들에게 돈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성당마다 유해가 모셔져야 하며 유해를 모시지 않은 성당은 축성할 수 없다 △성직자들은 허가 없이 자기 교구를 떠나서는 안 되며 값비싼 장신구를 착용해서도 안 된다 △주교나 수도원장은 교회 재산을 세속 권력에 넘겨줘서는 안 된다 등입니다.
공의회 마지막 제8차 회의는 10월 23일 열렸는데 장소는 소피아 성당이 아니라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는 마냐우라 궁전이었습니다. 수도 시민들이 니케아 공의회 결정 사항들을 잘 알아야 한다고 판단한 이레네 황후가 공의회 폐회 장소를 옮긴 것입니다. 공의회 교령이 낭독되고 모두가 이를 받아들인다는 고백이 따랐습니다. 교황사절들을 비롯해 참석 주교들은 물론 이레네 황후의 어린 아들 콘스탄티누스 6세 황제도 서명을 했습니다. 그리고 환호 속에 폐막했습니다. 공의회 결과
성화상 파괴 논쟁은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으로 교리상으로는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공의회 교부들은 성경과 교부들의 가르침 등을 근거로 성화상을 만들고 공경의 예를 표하는 것은 결코 우상숭배가 아님을 분명히 하고 이 가르침을 거부하는 이들을 단죄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특별히 주목할 것은 공의회 교부들이 성화상에 대한 공경과 하느님께 대한 흠숭을 구별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서방은 카를 대제(재위 768~814)의 프랑크 왕국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카를 대제는 로마 교회의 수호자, 정통 신앙의 수호자임을 자처했지요. 그런데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자신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나이 어린 황제의 비잔틴제국 영토에서 결정된 것이 몹시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카를 대제는 자신의 딸과 콘스탄티누스 6세 결혼이 깨진 것에 무척 자존심이 상해 있던 터였습니다. 게다가 대제가 입수한 교령의 라틴어 번역문에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쨌든 카를 대제는 794년 프랑크푸르트에서 교회회의를 소집해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을 반박하는 75개 조항을 발표하면서 비잔틴 황제 파문까지 요구합니다. 이른바 '카를 문서'였습니다.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이 조항들이 무지와 오해, 악의에서 비롯했다며 차근차근 설명하지요. 물론 비잔틴 황제에 대한 파문 요구도 거부했습니다.
제2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동방에서는 9세기 중반까지 성화상 파괴주의자들의 소동이 계속됩니다.
이창훈 기자 /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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