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노의 음식이야기]
<66>옥수수
마지못해 먹던 구황작물…옛 선조들 멀리해
우스갯소리로 사랑도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라고 한다. 음식도 비슷하다. 내가 먹는 것은 신의 선물이고 남이 먹는 것은 이상하고 하찮은 음식이다.
옥수수가 바로 그런 식품이었다. 지금 우리는 간식으로 맛있게 먹지만 시대와 지역에 따라 옥수수를 바라보는 눈은 각각 달랐다.
남미가 원산지인 옥수수는 고대 마야와 아스텍인의 주식이었다. 마야인에게 옥수수는 신이 죽어 환생한 거룩한 작물이었다. 사람도 옥수수 반죽으로 빚었다고 믿었다.
마야 신화는 16세기에 발견된 ‘포폴부(Popol Vuh)’라는 책에 기록돼 있다. 그리스 신화처럼 마야 신화에도 많은 신이 있다. 제우스에 해당하는 신이 ‘훈 후나푸’로 머리가 옥수수 모양이다. 지하세계의 신과 싸우다 전사했는데 적들이 목을 베어 죽은 나뭇가지에 꽂았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죽은 나무가 살아나 땅속의 갈라진 틈을 뚫고 자라더니 훈 후나푸의 머리를 닮은 열매가 열렸다. 마야문명에서 옥수수는 신이 죽었다가 부활한 작물이다.
‘포폴부’에 실린 신화에서 인간은 케찰코아틀이라는 창조의 신이 만들었다. 생각하는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하도록 만드는 신으로 옥수수 가루를 반죽해서 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간은 신을 닮은 존재인 것인데 고대 마야인에게 옥수수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주는 신화다.
반면에 우리 조상에게 옥수수는 차마 먹기 힘든 작물로 다가왔다. 아마 감자를 제외하고 우리나라에 가장 늦게 전해진 작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역어유해’에 옥촉(玉촉)이라는 것이 있는데 잎 사이에 뿔처럼 생긴 꾸러미가 달렸고 속에는 구슬 같은 열매가 있어 맛이 달고 먹음직스럽지만 곡식 종류는 아니라고 했다. 그러니 이익이 살았던 18세기 초중반까지만 해도 옥수수는 흔한 작물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널리 먹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정조 때 사람인 다산 정약용도 ‘경세유표(經世遺表)’에 옥수수를 형편없는 곡식으로 묘사해 놓았다. 정약용은 열일곱 가지의 곡식을 좋은 것대로 순서를 정하면서 옥수수는 열여섯 번째로 꼽았다. 제일 마지막은 율무다. 어떤 기준으로 선정을 했는지 설명이 없고 지금 시각으로는 납득할 수도 없지만 어쨌든 조선 후기에 옥수수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던 작물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정약용보다 다소 젊은 추사 김정희도 문집인 ‘완당집(阮堂集)’에서 70세 노인이 끼니로 옥수수를 먹는다는 말을 듣고 망연자실해 하는 장면이 보인다. 1926년의 신문에도 평안남도 화전민들이 이산 저산 쫓겨 다니며 옥수수와 콩으로 모진 목숨 이어가고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또 1960, 70년대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는 밥 대신 옥수수를 양식으로 먹었으니 옥수수에 대한 시선이 고울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옥수수가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식품이 된 것도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다. 옥수수가 신이 준 선물인지 마지못해 먹는 구황작물인지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한창 제철을 맞은 옥수수를 보며 떠오른 감상이다.
<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