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
진시황릉 시안 병마용갱은 ‘태산의 티끌’
기사입력 2012-04-21 03:00:00
◇제국의 빛과 그늘/장점민 지음·김영수 편역/572쪽·3만 원·역사의아침
표정까지 섬세하게 표현된 늠름한 진나라 군인과 실물크기의 말 등 8000개가 넘는 흙 인형이 출토된 중국 시안(西安)의 병마용갱. 이곳은 진시황릉을 대표하는 유물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병마용갱은 진시황 능원(陵園)에 딸린 200여 배장갱(陪葬坑)과 배장묘(陪葬墓) 중의 한 곳일 뿐이다. 진시황(기원전 259년∼기원전 210년)이 묻혀 있는 봉분인 진시황릉은 현재까지 발굴되지도 않았다.
진시황이 등극한 13세 때부터 38년간 80만 명이 동원된 거대한 능원은 어떻게 조성했을까. 산시(陝西) 성 고고연구소 연구원인 저자가 진시황 능원 유적을 40년 가까이 발굴하고 연구해온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능원 곳곳을 꼼꼼하게 안내한다.
기원전 221년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국가를 이룬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에 많은 공을 들였다. 진시황이 묻힌 봉분(조성 당시 115m, 현재 약 55m)을 둘러싼 외성(바깥 성)만을 기준으로 해도 면적이 축구장 978개 크기인 211만 m²(약 70만 평)에 이른다. 1974년 발굴된 병마용갱 1호는 외성의 바깥에 있다. 지금도 많은 유물과 유적이 외성의 바깥에서 발견되고 있어 능원의 정확한 규모는 확정되지 않았다.
진시황 능원에서는 병마용갱, 동마차갱, 마구갱, 순장갱 등이 발견됐다. 동마차갱에서는 2000여 년 전의 눈부신 공예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동마차가 나왔다. 지금까지 발굴된 말 마차 무기 악기 화폐 등은 당시의 역사와 문화, 과학기술을 짐작하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토기와 벽돌에는 진나라 당시의 다양한 문자도 새겨져 있다.
봉분 아래 지하궁의 실체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진시황릉을 발굴한다는 것은 이 지하궁을 세상에 보인다는 뜻이다. 베일에 가려진 지하궁에는 진시황의 시신을 담은 덧널이 안치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 지하궁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했다. “우물 셋 깊이만큼 파고 덧널까지 이르도록 동을 부었다… 수은으로 하천과 바다를 만들어 기계에 의해 쉬지 않고 흐르게 했다. 천장에는 천문도를, 바닥에는 지도를 만들었다. 인어 기름으로 초를 만들었는데, 오랫동안 꺼지지 않게 계산했다.” 실제로 1982년 조사에서 진시황릉의 봉분토는 중앙으로 갈수록 수은 함량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저자는 진시황의 아버지를 진나라 왕으로 옹립한 여불위와 진시황의 신임을 받은 이사가 승상의 직위를 맡아 이 거대한 공사를 주도한 것으로 본다. 또 진시황릉이 지금의 자리에 위치한 이유에 대해서는 근처에 금과 옥이 많이 나 진시황이 이를 탐했기 때문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반박하며 “당시 선조들부터 서쪽에 묻는 예에 따라 진시황의 무덤도 그 이전 왕들 무덤의 동쪽에 순서대로 자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진시황릉을 발굴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저자는 2200여 년 전 서한의 개국 황제 유방 때부터 진시황릉 보호 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소개하며 지하궁의 구조부터 명확히 알아낸 뒤 신중에 신중을 기한 다음에 발굴을 시도하자고 제안한다. 중국 국무원도 기술과 고급 발굴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발굴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저자가 쓴 6권의 책을 종합해 엮은 때문인지 비슷하거나 같은 구절, 같은 사진이 중복되는 점이 거슬리지만 시안에 가지 않고도 진시황릉 구석구석을 돌아본 듯 뿌듯한 느낌을 준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중국 진시황 능원의 일부인 1호 병마용갱. 병마용은 원래 채색돼 있었지만 발굴 이후 점차 색을 잃었다.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신
발에 돌기를 만든 것까지 섬세하게 표현됐다. 진시황릉 자체의 발굴은 1950년대 이후 산시 성 지방정부가 여러 차례 제안했지만 중앙정부가 허락하지 않았다. 역사의아침 제공
진시황이 등극한 13세 때부터 38년간 80만 명이 동원된 거대한 능원은 어떻게 조성했을까. 산시(陝西) 성 고고연구소 연구원인 저자가 진시황 능원 유적을 40년 가까이 발굴하고 연구해온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능원 곳곳을 꼼꼼하게 안내한다.
기원전 221년 중국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통일국가를 이룬 진시황은 자신의 무덤에 많은 공을 들였다. 진시황이 묻힌 봉분(조성 당시 115m, 현재 약 55m)을 둘러싼 외성(바깥 성)만을 기준으로 해도 면적이 축구장 978개 크기인 211만 m²(약 70만 평)에 이른다. 1974년 발굴된 병마용갱 1호는 외성의 바깥에 있다. 지금도 많은 유물과 유적이 외성의 바깥에서 발견되고 있어 능원의 정확한 규모는 확정되지 않았다.
진시황 능원에서는 병마용갱, 동마차갱, 마구갱, 순장갱 등이 발견됐다. 동마차갱에서는 2000여 년 전의 눈부신 공예기술을 확인할 수 있는 동마차가 나왔다. 지금까지 발굴된 말 마차 무기 악기 화폐 등은 당시의 역사와 문화, 과학기술을 짐작하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토기와 벽돌에는 진나라 당시의 다양한 문자도 새겨져 있다.
봉분 아래 지하궁의 실체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진시황릉을 발굴한다는 것은 이 지하궁을 세상에 보인다는 뜻이다. 베일에 가려진 지하궁에는 진시황의 시신을 담은 덧널이 안치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 지하궁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했다. “우물 셋 깊이만큼 파고 덧널까지 이르도록 동을 부었다… 수은으로 하천과 바다를 만들어 기계에 의해 쉬지 않고 흐르게 했다. 천장에는 천문도를, 바닥에는 지도를 만들었다. 인어 기름으로 초를 만들었는데, 오랫동안 꺼지지 않게 계산했다.” 실제로 1982년 조사에서 진시황릉의 봉분토는 중앙으로 갈수록 수은 함량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저자는 진시황의 아버지를 진나라 왕으로 옹립한 여불위와 진시황의 신임을 받은 이사가 승상의 직위를 맡아 이 거대한 공사를 주도한 것으로 본다. 또 진시황릉이 지금의 자리에 위치한 이유에 대해서는 근처에 금과 옥이 많이 나 진시황이 이를 탐했기 때문이라는 기존의 주장을 반박하며 “당시 선조들부터 서쪽에 묻는 예에 따라 진시황의 무덤도 그 이전 왕들 무덤의 동쪽에 순서대로 자리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진시황릉을 발굴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저자는 2200여 년 전 서한의 개국 황제 유방 때부터 진시황릉 보호 의식이 있었다는 것을 소개하며 지하궁의 구조부터 명확히 알아낸 뒤 신중에 신중을 기한 다음에 발굴을 시도하자고 제안한다. 중국 국무원도 기술과 고급 발굴 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발굴을 허가하지 않고 있다.
저자가 쓴 6권의 책을 종합해 엮은 때문인지 비슷하거나 같은 구절, 같은 사진이 중복되는 점이 거슬리지만 시안에 가지 않고도 진시황릉 구석구석을 돌아본 듯 뿌듯한 느낌을 준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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