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자에게 드러나시는 하느님의 강한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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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석 신부(전주교구 신풍본당 )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 모인 이들을 가르치셨다.
많은 이들이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하며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은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하고 이르셨다.
한국교회는 7월 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이 있는 주일에 대축일 미사를 드린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에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났다. 그는 1836년 프랑스인 모방 신부에게 신학생으로 선발돼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로 떠난다. 1844년 부제가 돼 귀국하지만, 이듬해 페레올 주교의 조선 입국을 위해 제물포에서 작은 돛단배를 구해 다시 상해로 간다.
라파엘호로 이름 지은 배에 몸을 실은 김 신부는 극심한 고생 끝에 상해에 도착한다. 1845년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는 중 거센 풍랑을 맞아 표류한다. 극적으로 도착한 곳이 지금의 충남 강경 부근 나바위였다.
김 신부는 그 후 중국에 있는 선교사들 입국을 준비하던 중 1846년에 체포돼 군문 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는 1925년 7월 5일 시복됐고, 1949년 11월 1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가 됐다. 교황청은 7월 5일을 김대건 신부 축일로 정했다. 김 신부는 1984년 5월 6일 성인반열에 올랐다.
김대건 신부는 혹독한 천주교 박해에도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했다. 작은 돛단배에 몸을 싣고 수차례 험난한 바다를 건넜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교회와 신앙을 지키려 한 김 신부의 행적을 떠올리게 하는 어느 선교사의 독백이 있다.
"주님 저를 이렇게 묶어주셨으니 감사드리나이다. 때로는 주님의 분부가 짐으로만 여겨지고, 주님의 계율 앞에 제 뜻을 펼 바를 몰라 암담했나이다. 그러나 오늘 이 순간보다 주님께 더 가까이 묶인 적은 없었나이다. 제 몸의 어느 지체를 살펴보아도 주님께로부터 조금이라도 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나이다."
이 독백은 프랑스의 시인이며 극작가였던 폴 클로델(Paul Claudel)이 1929년에 쓴 「공단 신발」(Le Soulier de satin)이라는 극의 서막에 나온다. 해적에게 격침된 난파선의 나뭇조각을 붙잡은 선교사가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다.
오늘 제2독서에서 예수님은 바오로 사도에게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 말씀하셨다. 바오로 사도는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하고 자신의 신앙을 전했다.
하느님의 전능은 보잘것없는 인간을 통해 드러난다.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신은 인간 속에 있는 '당신의 모습'을 보신다. 하지만 사람들은 선입견을 품고 상대의 외형만 보고 판단한다. 예언자들이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도 이와 같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실에서 우리 대부분은 '부유층인가 빈곤층인가', '고등교육을 받은 자인가 아닌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자인가 낮은 자인가'하는 선입견을 품고 상대를 판단한다. 가난하고, 배움이 적고, 약한 자는 죄 없이 인격적 살해를 당하기도 한다. 가난한 이가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빵 한 개 훔치는 것은 불법행위로 처벌하면서, 부유한 자가 넘치도록 재화를 쌓아두고 수십억 생명이 비참하게 굶어 죽는 것을 외면하는 불의가 정당화되는 세상이다.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재물 축적과 권력 소유는 불의이지만 불법은 아니라며 처벌받지 않는다. 심지어 재력과 권력을 이용하여 법의 비호를 받는 것이 통례처럼 돼간다.
노자가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고 한 이 평범한 말의 뜻은 많이 가진 자와 더 배운 자가 겸손하게 베풀고 나눠 줘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인들이 강한 자와 약한 자를 구별하는 기준은 세상 재력의 많고 적음이 아니다. '하느님 은총과 사랑이 얼마나 많이 그 사람과 함께 하시는가'에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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