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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성녀(聖女)…소피아(최분이) 수녀

namsarang 2012. 12. 24. 14:40

[최보식이 만난 사람]

 

우리 시대의 성녀(聖女)…소피아(최분이) 수녀

                                                                                                                                                                                                           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 2012.12.24

“내 손을 보면 ‘오리발’이라고 해… 나는 배운 게 없어 식모일만 했거든”

우리 시대의 성녀(聖女)…소피아(최분이) 수녀

“이 세상에 내가 안 온 걸로 치고 내가 그 일을 하게 해달라 시래기를 주워도 안 굶게 하고”

마더 테레사 방한해 그 방에서 잠자 김수환 추기경, “저기 수녀 왕초다” 임종 직전 이방자 여사에게 세례 줘

"이제 늙은 할매가 다 돼서 일도 안 하는데… 꼭 오셔야 해요?"

마산역에서 내려 진동 방면으로 40분 걸리는 외진 동네에 '요셉의 집' 문패가 보였고, 소피아(최분이·74) 수녀는 사내 아홉 명과 함께 살고 있었다.

"아까 운전하던 그 아이는 쓸개도 없고 간도 조금 남았어. 다들 죽을 거라 했는데 지금 완전히 정상이 됐어요. 동네 사람들은 여기에 누가 사는지 몰랐지. 내가 술꾼들을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나면, 못 들어오게 할 수도 있거든. 이 집을 애들과 같이 지었어요. 나를 '왕초' '대빵' '엄마' '할마시', 지그들 좋은 대로 불러. 여기에 온 지 5년쯤 됐나."

키 작은 노(老)수녀의 말씀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조리가 없었다. 하지만 거칠고 터 갈라질 듯한 그의 검붉은 손은 모든 걸 말해줬다. 내가 손을 잡자, "사람들이 '갈쿠리' '오리발'이라고 해. 배운 게 없어 평생 식모 일을 했거든" 하며 수줍어했다.

소피아 수녀는“부랑자들은 나를‘왕초’‘대빵’이라며 자기 좋은 대로 불렀다”고 말했다. 남강호 기자
―수녀님이 식모 일이라니요?

"수녀들 중에도 머리 좋은 사람은 공부를 시키는데, 우리처럼 일에 미쳐 사는 사람은 공부 머리가 안 되잖아요. 대구시립희망원(부랑아 복지시설)에서 일하겠다고 하니까, 총장 수녀님께서 '복지사 자격 있어요? 자격증 없으면 안 돼요' 하잖아요. 제가 '씻기고 닦이는 것도 자격증이 필요한가요?" 했지. 남들이 다 안 가려고 하는데 그런 소리까지 들어가면서 갔어요. 거기서도 10년간 '식모 일'을 한 거죠. 뒤에 공부를 해서 자격증을 따긴 했어요."

―어떤 일을 하셨길래.

"제가 주방을 담당했어요. 부식비가 적게 나오니, 트럭을 타고 이곳저곳 부식 사러 다녔어요. 요양원 측은 나보고 '불도저'라고 했어요. 요양원 마당에 오리를 1000마리나 키웠어요. 오리알을 삶아 먹이려고, 그릇 던지고 싸움이나 하는 애들도 잘 먹이니까 조용해졌어요. 아이들은 내가 안 보이면 '우리 두목 어디 갔나'라고 했고."

―부랑아들이 술에 취해 수녀님께 행패 부리지는 않았나요?

"내 말은 그래도 잘 들었어요. 술 취해서 내 앞에서 바지를 홀딱 벗고서 '치료해달라'고 하거든. 내가 '야 사내자식이 가릴 것은 가려야지' 하면, '엄만데 어떠노'라고 해요."

―비록 수녀님이나, 여성의 몸인데.

"얼굴 생김도 무서운 깡패 중의 깡패가 있었어. 한번은 이 아이가 눈이 뒤집혀서 '너를 죽여버린다. 오늘 한번 해보자'며 왔다갔다 해. 그러곤 주전자에 든 우유를 내 옷에 들이붓는 거야. 누군가가 이를 보고 파출소에 신고를 했어요. 경찰이 와서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놈이 어디 있습니까?' 묻는데, 나도 모르게 '아까 장난치고 갔습니다'라고 답했어요. 경찰이 떠나자, 이 아이가 '엄마' 하며 무릎을 꿇어요. '다른 사람들에겐 옷도 갈아 입혀주고 약도 주더니 왜 나한테는 안 해줬어. 나도 엄마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앞으로는 다시는 이런 짓 안 하겠다'며 우는 거야. (울먹이며) 나도 걔가 무서워서 가까이 안 했는데."

―1981년 5월 마더 테레사 수녀가 방한해 대구시립희망원까지 내려와 "노벨 평화상은 소피아 수녀가 받아야 하는데 내가 받았다"고 말했다면서요?

"그 소리는 할매(테레사)가 그냥 말한 거지. 내가 원장 수녀나 되는 줄 알고 잘못 말한 거지. 나는 희망원에서 부식이나 사러 다니는 식모였는데."

―지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 하늘에서는 가장 높은 곳 아닌가요?

"그러면 큰일 나지. 원장은 원장이지. 하여튼 그때 테레사가 마음이 상했어. 자기만을 보려고 인파가 몰려들었거든."

―그게 왜 마음이 상할 일인가요?

"사람들이 희망원에 있는 아픈 아이들한테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를 보려고 서로 밀치고 하니까 그랬지."

―당시 마더 테레사가 수녀님 방에서 주무셨다면서요?

"내 연탄방에서 자고 싶다고 해서 그랬어요. 그 방은 연탄가스 냄새가 나서 문을 꼭 열어놓아야 하는데."

마더 테레사와의 만남(왼쪽이 소피아 수녀).

―두 분이 그전에 인연이 있었던 건가요?

"한국에 오시기 2년 전에 내가 초청을 받고 인도 콜카타로 가서 테레사를 만났거든. 통역이 나에 대해 뭐라고 얘기를 한 것 같아. 내가 무식해 대화가 잘 안 되는데도 서로 마음이 통했는지. 그분과 얘기하다가 서로 계속 울었어요."

―수녀님이 왜 무식합니까?

"나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셈이지. 내가 무식하게 살았어요. 엄마가 몸이 불편해 나는 집을 돌봐야 했지. 오빠와 동생들은 공부했고."

―가톨릭 집안이라, 21세 때 수녀원에 들어가신 겁니까?

"가톨릭 집안이 아니야. 내가 어려운 사람과 같이 살고 싶어서. 내가 죽어도 간다니까 부모님이 못 말렸어. 삼천포(사천)에서 아버지가 건축 일을 해서 먹고살 만했어. 그런데 집에 있는 것을 내가 다 퍼다 주니까."

―퍼다 주다니요?

"6·25 직후라 다리 밑에 거지들이 우글거렸어. 피란 내려온 어려운 사람이 많았거든. 집에 있는 된장·고추장을 막 퍼다 줬어. 어렸을 때부터 남 돕는 게 그렇게 좋아. 엄마가 '이놈의 기집애야, 네 아버지가 그냥 돈을 주워 온 줄 아나. 저걸 다리몽댕이를 부숴버릴까' 하며 야단도 많이 쳤어요. 아버지 생신날 광어를 넣어 미역국을 한 솥 끓여놨는데, 문밖에 할아버지들이 추위에 떨고 앉아 있어. '빨리 들어오이소' 하며 내 방에서 한 그릇씩 퍼줬어요. 엄마가 알고는 '저년이 애비 생일도 모르고' 하며 혀를 찼어. 에이, 이런 얘기 그만해. 창피하잖아."

―남 주고 나면 안 아까운가요?

"기분이 좋으니까 그렇게 하지. 내 손에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다 이뤄졌어. 대구에서 최초로(1989년) 무료 급식소를 할 때도 그랬어요. '내일 먹일 쌀이 없는데 어쩌나' 걱정하는데 누군가가 트럭에 열 가마니를 싣고 왔어. 함께 일하던 수녀들과 쌀가마를 두들기며 울었어. (울먹이며) 그런 좋은 사람들이 어떻게 그때를 맞춰서 보내줬겠어. 이는 하느님이 하신 거지."

―수녀님이 무슨 재원으로 무료 급식소를 시작할 수 있었죠?

"무료 급식소를 시작하겠다고 하니까, 수녀원 총장님께서 '불쌍하다고 어떻게 다 도와주나'며 말렸어요. 제가 '이 세상에 내가 안 온 걸로 치고 내가 할 수 있게 해달라. 시래기를 주워 먹여도 안 굶게 할 것이고, 수녀원에는 절대 부담이 안 되도록 하겠다'고 했어요."

1993년 1월 당시 한 신문은 '기적처럼 매일 첫새벽에 쌀, 생선, 헌 옷, 콩나물을 문 앞에 두고 가. 의인(義人)들의 행렬이 이어져'라며 무료 급식소에 대해 보도했다.

―정말 그랬나요?

"10평도 안 되는 비가 새는 빈집에서 시작했어. 그런데 많은 사람이 갖다놓고 가거든. 유리창 밑으로 2만원과 함께 '된장 하나 끓여줘라'고 메모를 남겨놓고. 자고 나면 대문 앞에 먹을 것을 놔두고 가는 거야. 그 사람들 얼굴은 모르지. 하느님이 역사(役事)를 하신 거지."

―그 뒤 경북 성주에서 기증받은 임야를 개간해 부랑아 숙식 시설을 지었다면서요?

"술 취해 아무 데나 퍼질러 자니까. 부랑자들을 그리로 데려왔지. 제가 '하느님은 애들 마음을 잡아주이소'라고 기도했어요. 모두들 술을 끊고 열심히 일해서 같이 살 집을 지었지."

―잘 지은 집을 떠나 왜 이쪽으로 옮겼죠?

"한군데 10년 이상 머물 수 없다는 수도원 규정이 있어. 그중에 몇 친구가 나를 따라왔지. 늙은 할매와 함께 살 집을 지어야 하니까."

―부랑자들과 한 공간에 살면 불안하지 않은가요?

"우리는 가족인데. 여기서 아이들은 술을 안 마셔. 얼마나 얌전하다고."

―1970년 초에는 경북 봉화군 나환자(한센병) 정착 마을에서 일을 하셨다면서요?

"그 얘기를 누가 했어요? 그 사람들과 어울리려면 같이 자고 먹어야지. 함께 손잡고 율동도 하고. 모녀가 사는 방에서 잤지요. 방에는 썩는 냄새가 지독해. 이런 얘길 하면 안 되는데, 나중에 다른 수녀들이 힘들잖아."

―한센병 환자가 밥에 치료제 연고를 발라서 시험하려고 했다면서요?

"진물 날 때 바르는 연고야. 밥뚜껑을 여니 색깔이 시퍼렇게 변해 있어. 얼른 밥 위쪽을 떠서 상다리 밑에 두고는 그냥 먹었어. 왜 그랬는지 묻지는 않았어."

―수녀님이라도 육신의 감각을 갖고 있으니 찜찜했겠지요.

"괜찮다는 마음이 있었으니 그렇게 했지요."

―그런 마음은 어디서 나오죠?

"측은한 마음이지. 남의 아픔을 나누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도 병자나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렇게 하셨거든."

김수환 추기경 생전에 교유가 깊었다지요?

"참 이상해.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네. 저를 참 좋아하셨죠. 저를 보면 '저기 수녀 왕초 아이가. 아이고 무서워라. 소피아가 쌀 떨어졌을 때 쌀가마를 안 보내주면 혼난다'고 우스개 말씀도 하셨죠. '요셉 성인께서 보내신 겁니다'라며 돈도 부쳐주셨지요. 미사를 친히 집전하면서 저를 위해 축복해주시기도 했어요."

―처음 어떤 인연으로 추기경을 만나신 겁니까?

"이방자(순종의 이복동생인 영친왕의 일본인 부인) 여사가 임종하시기 전에 저를 서울대병원으로 불렀어요(1989년). 제게 영세를 받고 싶다고 해서, 신부님 대신 그렇게 해줬어요. '하늘나라에 가서 사랑하는 애인(영친왕)도 만나세요'라고 했지요. '하이, 하이, 소데쓰요(예, 예, 그렇지요)'라고 답했어요. 나중에 돌아가신 뒤 추기경께서 이 소문을 듣고 저를 찾으신 거예요."

―그러면 이방자 여사와는 어떻게 만난 겁니까?

"인도에 마더 테레사를 만나러 갈 때였지요. 내가 비행기를 어떻게 타고 가는지 알아야지.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지요. 그런 걱정을 할 때 이방자 여사가 유럽 8개국을 돌며 '궁중 의상 발표회'를 연다는 것이었어요. 그 일행에 끼워줘 한 달간 유럽 여행을 같이했어요. 의상 발표회에서 저는 남자처럼 생겨서 영친왕으로, 여사님은 왕비로 손잡고 걸어나갔어요. 그걸 마치고서 파리에서 안내자와 함께 인도로 갔어요. 제가 무식해도 이런 고급 사람들도 사귀었어요(웃음)."

그를 떠나오면서 '이런 것이 축복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