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특집 / 대한민국 건국 외교와 UN, 그리고 바티칸의 역할
| ▲ 제3차 유엔총회에 대한민국 승인을 받고자 떠난 대표단의 장면 수석대표의 제1호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 앞뒷면. 앞면에는 장 수석대표를 UN 특사와 바티칸 특사로 파견한다는 내용이 영문으로 기록돼 있으며, 뒷면에는 장 수석대표의 사진과 입ㆍ출국 도장이 찍혀 있다. |
대한민국이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투표에 참여한 55개 회원국 중 찬성 48, 반대 6, 기권 1표로 국제사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을 받는 데 바티칸이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미국은 1948년 9월 21일에서 12월 12일까지 열린 UN 총회를 통해 회원국들이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기까지 공식 승인을 미루고 있었을 뿐 아니라 1948년 8월 한국에 부임한 존 무초조차도 대사가 아니라 대표였으며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된 것은 1949년 4월의 일이었다. 다만 당시 미 공화당 정치고문으로 UN에 파견돼 있던 존 포스터 덜레스(훗날 미 국무장관)는 주한특사 무초를 파리로 불러들여 한국 승인 외교를 지원토록 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받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바티칸은 그 이전인 1947년 8월 초대 주한교황사절로 패트릭 번 신부(1949년 4월 17일 가제라 명의 주교 임명)를 임명하고, 그해 10월 19일 그의 입국과 동시에 '한국을 한반도의 합법적 독립국가로 인정한다'고 발표, UN 승인 이전 유일하게 대한민국을 정부로 인정함으로써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서 승인을 받는 데 결정적으로 이바지했다는 것.
물론 이같은 사실은 기존에도 일부가 알려져 있었지만,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서 유엔에서의 국제적 승인을 받기 위한 외교활동이 조명을 받지 못함으로써 그간 상당 부분이 가려지고 묻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당시 장면(요한) 수석대표가 소지했던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장 수석대표를 대통령 특사로 유엔 뿐 아니라 바티칸에 파견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밝혀져 정부 수립 당시 바티칸이 대한민국의 건국 외교를 후원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됐다.
이같은 사실은 허동현(스테파노) 경희대 교양전담대학인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한국과 바티칸 수교 50주년을 맞아 지난 7월 「숭실사학」 제30집을 통해 발표한 '대한민국 건국 외교와 유엔(UN)'을 통해 소상하게 밝혀졌다.
이 논문에 따르면 장 수석대표를 비롯한 대표단은 UN 회원국이 아니었기에 제3차 UN총회가 열린 파리 샤이오궁 본회의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1948년 12월 7일 대한민국 대표단 초청안이 가결되기까지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에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한민국 승인의 당위성을 회원국 대표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기간이 3개월이 채 못될 만큼 짧았고,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정국 불안과 국론 분열, 소련 대표 비신스키를 비롯한 공산 진영의 고의적 지연작전으로 대한민국 승인을 위한 대표단의 활동에 장애를 가져왔다.
따라서 대한제국 시대 여권을 참조해 만든 제1호 대한민국 외교관 여권을 지니고 프랑스로 떠난 장 수석대표를 비롯한 대표단 8명은 직업 외교관들을 상대로 국가 사활이 걸린 승인을 얻어내는 외교적 교섭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던 비오 12세 교황은 1947년 장 수석대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번 신부를 특사로 한국에 파견, 국제 관례상 바티칸이 한국을 주권국가로 승인한 것으로 비춰지도록 함으로써 한국이 국제적 승인을 얻는 과정에서 큰 힘이 되도록 했다. 또 장 수석대표는 서울대교구 혜화동본당 주임으로 당시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생제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순례를 하던 중 우연히 만난 호주 시드니대교구 오브라이언 부주교(현 총대리)의 도움으로 당시 호주 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였던 짐 플린스코트를 소개받아 당시 유엔총회 의장인 호주 대표 에바트를 설득하는 데 성공, 한국 승인을 이끌어냈다.
허 교수는 "당시 장면 수석대표를 UN 특사뿐 아니라 바티칸 특사로 파견했다는 것은 바티칸이 대한민국 정부 승인 막전막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만약에 건국 외교가 UN에서 승인을 받지 못했다면 6ㆍ25전쟁 발발 직후 UN군이 파병될 근거를 찾기 어려웠을 테고 파병도 성사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밝혔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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