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야기

<5> 유다 총독

namsarang 2014. 2. 9. 23:04

[복음 이야기]

<5>유다 총독

 

유다인 경멸하면서도 두려워한 빌라도 총독

 

▲ 로마 제국 유다 총독의 주요 임무는 질서유지와 세금(공물)징수, 사형을 선고할 수 있는 형사재판권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사진은 로마 성계단 성당에 있는 빌라도에게 신문받고 있는 예수님 상. 리길재 기자
헤로데 아르켈라오스의 폭정에 견디다 못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로마 황제에게 대표단을 보내 영주를 몰아내고 총독을 보내주면, 대사제 임명권을 상징하는 예복을 맡기겠다고 협상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유다와 이두매아, 사마리아의 영주 헤로데 아르켈라오스(기원전 23~서기 18년, 재위 기원전 4~서기 6년)를 면직 추방하고 그의 영토를 '총독 속주'로 개편했다.

 로마 황제는 제국을 이탈리아 본토와 3종류의 속주, 봉신 왕들의 왕국 영토로 나눠 통치했다. 속주는 황제 속주와 원로원 속주, 행정장관 속주로 구분됐다. 황제 속주는 말 그대로 황제에게 속한 땅으로 법무관이 '속주장관'으로 황제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원로원 속주는 원로원에 속한 영토로 집정관이 '총독'으로 다스렸다. 또 행정장관 속주는 최근에 정복했거나 통치가 어려운 지역을 행정 장관이 다스리는 영토를 말한다. 유다는 행정장관 속주였다. 행정장관은 원로원 의원급에서 임명되지 않고 주로 군인 계급에서 선임됐다. 행정장관의 주요 임무는 △질서유지 △세금(공물)징수 △'칼의 권리' 즉 사형선고까지 내릴 수 있는 형사재판의 전권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편의상 행정장관도 속주 총독으로 불렸다.
 
 유다 행정장관(총독)

 초대 로마의 유다 행정장관 즉 총독은 서기 6년에 부임한 코포니우스였다. 그가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던 날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약속대로 그에게 대사제 예복을 맡겼다.

 유다 총독은 시리아 총독에게 종속됐다. 코포니우스가 초대 유다 총독으로 부임했을 때 시리아 총독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였다. 바로 루카 복음 2장 2절에 나오는 인물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에서 로마식 인구 조사를 두 차례 실시한 장본인이다.

 퀴리니우스 시리아 총독에 대해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가 발행한 「주석 성경」은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퀴리니우스는 시리아 총독으로서 마태오 복음 2장 19절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뒤(루카 1,5 참조), 헤로데 임금이 죽은 지 10년 뒤인 기원 후 6년에 팔레스티나에서 호적 등록 또는 인구 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12년부터 근동의 로마 통치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가 실제로는 헤로데가 죽기 전에 이미 호적 등록을 시작하였는지, 루카가 나중에 실행된 호적 등록을 앞당겨 이야기하는지, 현재의 자료로는 판단하기가 어렵다."

 하여튼 퀴리니우스 시리아 총독 시절에 초대 유다 총독으로 부임한 코포니우스의 첫 활동은 인구 조사에 반발하는 유다인들을 진압하는 일이었다. 그의 재임(서기 6~9년) 시절에 사마리아인들이 무교절에 예루살렘 성전 입구에 사람 뼈를 뿌려 더럽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돌이킬 수 없는 원수 관계가 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시리아 총독과 함께 한나스를 대사제로 내세우고 최고회의를 재정비하게 했다.
 
 본시오 빌라도

 예수님 시대 유다 총독은 본시오 빌라도(재임 26~36년)였다. '창으로 무장한 자'라는 자신의 이름처럼 빌라도는 군인 출신이었다. 그는 군기와 당시 로마 황제인 티베리우스의 상을 예루살렘에 들여오려 했다가 병사를 동원해도 물러서지 않는 유다인의 강력한 항의에 부딪혀 철회하고 대신 황제의 이름이 새겨진 금방패를 자신의 관저인 카이사리아 헤로데 궁전에 들여놓았다. 그는 또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 상수도를 설치하면서 건설 자금으로 예루살렘 성전 금고에 있는 은을 강탈했다가 유다인의 폭동을 유발했다. 그는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유다인으로 위장한 군인들을 군중 속에 잠입시켜 닥치는 대로 살육케 했다. 또 한 번은 성전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했다(루카 13,1).

 요한 복음서는 빌라도를, 바른 일을 하려고는 하지만 로마의 평판에 신경을 쓰고 유다인을 경멸하면서도 동시에 그들을 두려워한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자로 그리고 있다. 빌라도의 이러한 성격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판 과정이다. 예수님의 죄목을 찾지 못한 그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 예수님을 풀어주려고 했으나 "그 사람을 풀어주면 총독께서는 황제의 친구가 아니오, 누구든지 자기가 임금이라고 자처하는 자는 황제에게 대항하는 것이오"(요한 19,12)라는 유다인의 외침에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렸다.

 빌라도는 이러한 성격 때문에 결국 실각했다. 36년께 한 예언자가 사마리아에 나타나 그라짐 산봉우리에 묻혀 있는 모세의 장막과 거룩한 기물을 발굴했다고 말했다. 군중들이 이를 보기 위해 그라짐 산에 몰려들었다. 폭동을 우려한 빌라도는 군대를 보내 산정을 점거하고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사마리아인 학살이 자행됐다. 이에 시리아 총독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는 '사마리아인 학살을 명령했다'는 이유로 빌라도를 파면하고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빌라도에게 추방 후 자살을 명했다.

 빌라도 실각 후 유다 총독제는 30년간 지속됐으나 37~44년까지 팔레스티나의 행정권은 헤로데 임금 때처럼 다시 속령의 군주에게 위임됐다. 이 유다의 마지막 왕이 헤로데 아그리파로 야고보 사도를 칼로 죽이고 베드로 사도를 감금했던 인물이다(사도 12,1-3).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