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땅

(17) 바오로의 고향, 타르수스

namsarang 2014. 7. 19. 09:40

[성경 속 도시]

(17) 바오로의 고향, 타르수스

철학·교육 등 수준 높은 문화도시

▲ 타르수스에 있는 성바오로성당 내부. 출처=「IN the steps of saint Paul」



오늘날 터키의 중남부에 있는 타르수스는 국제 교류의 중심이며 두 가지 문화가 경계를 이루는 옛 도시다. 타르수스는 고대 북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하나인 히타이트 문명의 영향 아래 건설된 도시다. 고고학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기원전 3000~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도시는 천연 항구 도시로 지중해의 물물교환과 교통 왕래를 통해 빨리 발전했으며, 기원전 7세기를 전후로 고대 그리스인이 소아시아 지역에 활발히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할 무렵 이들의 문화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치드누스 강에서 목욕하다가 익사할 뻔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타르수스는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가 됐고, 기원전 64년에 로마에 병합됐다.

사도 바오로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곧은 길’이라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있는 사울이라는 타르수스 사람을 찾아라”(사도 9,11).

타르수스에는 유다인의 회당이 잘 형성돼 있었다. 바오로의 부친이 종교적으로 열성적이었기에 아들에게 히브리 원전으로 성경을 배우게 했다. 바오로는 학교에서는 그리스어로 된 칠십인역성경을 공부했고, 유다 정착촌 밖이나 집 안에서 그리스어로 말했다. 사도 바오로는 타르수스에서 태어난 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다.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은 나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벤야민 지파 출신이고, 히브리 사람에게서 태어난 히브리 사람이며,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입니다”(필리 3,5). 회심 후 3년이 지난 36년께 바오로는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난 다음(갈라 1,17-19), 고향 타르수스로 돌아가 약 8년 동안 지냈다. “형제들은 그것을 알고 그를 카이사리아로 데리고 내려가 다시 타르수스로 보냈다”(사도 9,30).

타르수스는 현재 거주민이 10만 명 남짓하지만 옛날에는 문화, 정치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로마제국 시대의 타르수스는 킬리키아 지방의 행정수도 역할을 했으며, 도시의 문화 수준이 아테네와 알렉산드리아에 버금갔다고 전해진다. 바오로 사도 시대에 타르수스는 교육과 철학 분야에서 아테네나 알렉산드리아보다 훨씬 우위를 차지했다. 타르수스는 서쪽의 그리스·로마 문화와 동쪽의 셈족과 바빌로니아 문화가 만나는 곳이었다. 이처럼 타르수스는 당시 헬레니즘 문화의 중심지였고 스토아학파의 유명 철학자들이 활약했던 곳이었다. 이곳에는 많은 유다인들이 이민 와서 정착해 있었기에, 이런 배경 속에서 사도 바오로는 자연스럽게 그리스어와 셈족어를 비롯한 문화를 익힐 수 있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부친에게 상속받아 로마 시민권을 지니게 됐는데, 그것은 훗날 그가 선교 활동하는 데 유용하게 사용됐다.

타르수스는 641년부터 아랍인의 침공을 받기 시작하면서 점점 쇠퇴했다. 현재 타르수스에는 바오로 시대의 유적이 거의 없다. 흔히 ‘클레오파트라 성문’이라 부르는 로마 시대의 성문만이 남아 있다. 이는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로마 장군 안토니우스와 함께 타르수스에서 신혼여행을 즐겼다는 전설에서 생긴 이름이다.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가 배로 지중해를 건너 치드누스 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유혹해 만난 곳으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