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 성향의 오만한 상류층 집단
| ▲ 사두가이는 대사제 등 이스라엘 고위 성직과 관료직을 독점한 유다교 정파이다. 사진은 조토가 그린 ‘가야파 앞에 서신 예수’ 프레스코화 |
오늘날 ‘통곡의 벽’이라 불리는 예루살렘 성전 서쪽 벽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유다인 지구는 예수님 시대 당시 사두가이가 주류를 이루던 상류층 거주 지역이었다. 이들은 주로 고급 관료와 고위직 사제, 대상, 지주들이었다.
사두가이는 기원전 2세기부터 서기 1세기까지 활동하던 유다교 유력 당파로 다윗과 솔로몬 시대 때 대사제였던 사독(2사무 8,17; 1열왕 1,34)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이방인뿐 아니라 율법을 철저히 지키지 않는 유다인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분리된 자’로 스스로 칭했던 바리사이처럼, ‘정의를 따르는 사람’ ‘의로운 사람’이란 뜻의 ‘사두가이’라 자랑했다.
사두가이는 마카베오 가문이 세운 하스모네아 왕조의 후원을 받으며 귀족 정치집단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기원전 109년 사마리아를 정복한 하스모네아 왕조 요한 히르카노스 1세(기원전 134~104년)와 손을 잡은 후 서기 70년 아브월(7~8월) 9일 예루살렘 성전 멸망 때까지 부와 상류층 특권을 누렸다. 자연히 그들은 사회 변화보다 현상 유지에 더 관심이 있었고, 종교적으로는 보수적 성향을 나타냈으며, 정치적으로는 항상 힘있는 외세에 협력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 사회의 두 주류였던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는 ‘이방인 세계에서 어떻게 하느님의 백성을 보호할 것이냐’는 질문에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시각차를 보여 원수처럼 냉랭했다. 사두가이는 모세 오경에 나오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았다. 바리사이와 달리 모세 오경을 폭넓게 해석할 수 있는 구전 전승을 철저히 거부했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해석도 바리사이와 사뭇 달랐다. 예를 들어 ‘보상법’을 다룬 레위기 24장 19-20절 규정(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다)에 대해 바리사이는 눈이면 눈에 대한 가치를 계산해 가해자에게 형벌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사두가이는 문자 그대로 가해자의 눈을 도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두가이는 또 안식년 규정을 엄격히 지켜 노예 해방이나 부채 면제 등을 엄격히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상류층이 주류를 이룬 사두가이는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지만 바리사이는 일반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또 바리사이들은 서로 우의가 있으며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뤘지만 사두가이는 서로 간에도 야비한 행동을 하며 마치 이방인 대하듯 무례했고, 신분이 낮은 자들에게는 오만하고 냉엄했다.
사두가이는 율법에 부활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죽은 자의 부활이나 천사, 영혼의 존재 등을 거부했다. 따라서 그들은 내세의 보상이나 형벌을 믿지 않았다. 따라서 현세의 삶을 중시하고 인간의 자유 의지와 책임을 강조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상응하는 보상과 징벌을 현세에서 받는다고 믿은 사두가이들은 현 사회에서 자기들이 누리는 지위와 부가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의 표지라고 여겼다.
복음서에서 사두가이에 대한 언급은 그리 많지 않다. 마르코(12,18)와 루카(20,27) 복음서에서 각각 한 번, 마태오 복음서에서 세 번(3,7; 16,1-12; 22,23-33) 나온다. 또 사도행전에는 사두가이가 예수님과 사도들의 적대자, 핍박자, 예수님과 사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대사제의 추종세력으로 등장하며 그리스도교 교리를 반박하는 자들로 묘사되고 있다(사도 4,1; 5,17; 23,6-8 참조).
예수님 시대 사두가이들은 성전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람들이었다. 성전에서 제사를 담당했던 고위 성직자들이요 귀족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는 유다인들에게 십일조를 거둬 성전 재정을 관장했다. 사두가이는 예수님께 대해서만은 바리사이와 같은 노선을 취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불변의 율법을 파괴한다고 여겼을 뿐 아니라 메시아 사상을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예수님의 활동은 로마인과 그들의 관계를 곤란하게 만들 우려가 있어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을 철저하게 반대했다.
사두가이는 그들의 주요 활동 무대였던 예루살렘 성전이 서기 70년 로마에 의해 파괴된 후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어 자연히 그 정체성도 함께 사라졌다.
리길재 기자 teotokos@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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