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사도가 성모님과 살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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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페소공의회가 열렸던 성모마리아성당 유적 |
에페소는 터키에서 가장 큰 고대도시다. 과거에는 실크로드의 종착지요, 거대한 무역항이 발달한 항구도시였다. 에페소는 헬레니즘 시대와 로마 시대에 황금기를 누리면서 많은 역사적 변환기에도 부를 축적했던 도시였다. 기원전 1세기에 에페소는 로마제국에 속하게 된다. 이후 많은 로마식의 건축물이 세워졌고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물인 도미티아누스 신전은 지금도 유명하다.
지진으로 폐허로 남아
에페소 번성기에는 바닷가에서 근처에 자리 잡은 도시의 원형극장까지 대리석으로 된 도로가 이어졌을 정도였다. 이렇게 번성하던 도시가 260년쯤 유럽에서 이주해 온 고트족들의 약탈과 방화, 말라리아와 때마침 일어난 대지진으로 폐허의 도시가 되었다. 특히 7세기부터 강에서 유입된 토사가 바다를 메우면서 에페소는 항구의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지진으로 에페소는 폐허가 되어 땅속에 잠겼지만 근대에 와서 유적이 발굴되어 과거의 위용을 일부나마 드러내고 있다.
성경에 보면 에페소는 사도 바오로와 인연이 깊은 도시다. 바오로 사도는 요한 묵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중 하나인 에페소에 교회를 세웠다. 그가 에페소에서 선교할 때 은으로 아르테미스 신전 모형을 만드는 사람과 이를 파는 상인들과 갈등을 겪었다. 그들은 신전 모형을 팔아 엄청난 부를 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우상숭배 금지에 대해 힘주어 설교했다. 사도 바오로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교인의 신전 모형을 더 이상 사지 않았으니 소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사도 19,19-40 참조).
훗날 사도 바오로는 로마의 감옥에서 에페소 신자들에게 두 통의 편지를 쓰기도 했다.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랑을 쏟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로마에서 사도 바오로가 순교하자 사도 요한이 에페소 교회를 이끌었다. 요한은 주님의 사랑받는 제자로 주님의 십자가 아래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끝까지 보살펴 드리는 제자였다. “이어서 그 제자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요한 19,27).
공의회도 개최
전승에 따르면 에페소에 도착한 요한과 성모 마리아를 위해 에페소 신자들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에페소 언덕 위에 있는 성모님의 집은 순례자들의 방문이 줄을 잇는다.
성모님의 집이 발견된 과정도 신비롭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성모님의 집의 존재는 잊혀 갔다. 그러다 1878년 한 번도 에페소를 와보지 않은 독일의 가타리나 에머리히(1774~1824) 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1891년 나자렛의 신부가 탐사반을 데리고 오늘날의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게 됐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그 집에서 정기적으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을 허락했고, 1967년 교황 바오로 6세,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이곳을 찾았다. 이후 많은 순례자들이 성모님 집을 찾고 있다.
사도 요한은 에페소에서 선종했고, 565년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그의 무덤 위에 성당을 건축하였다. 훗날 동로마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에페소에서 공의회를 개최한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요한 이후에는 바오로의 제자였던 티모테오가 지도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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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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