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복음]
큰아들은…
사순 제4주일(루카 15,1-3. 11ㄴ-32)
▲ 주수욱 신부(서울대교구 대방동본당 주임) |
오늘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 가운데에서 큰아들에게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큰아들은 작은아들이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떼를 쓸 때 그냥 조용히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나 봅니다. 동생은 그 돈을 몽땅 들고 멀리 떠나는데, 형은 말없이 아버지 집에 남습니다. 아버지를 섬기며 효도하는 기특한 아들이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아버지를 매우 무서워합니다. 어쩐지 형의 행동 하나하나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아버지 앞에 잘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나중에 스스로 말하기를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종처럼 섬겼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작은아들 때문에 많이 속상했지만, 큰아들의 말을 듣고는 마음이 훨씬 더 많이 상했습니다.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자신을 아버지의 종으로 여기는 녀석을 자식이라고 여기며 살아왔으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서운할 따름입니다.
작은아들이 유산을 내놓으라고 억지 고집을 부리고, 많은 돈을 들고 나가 버렸을 때보다도 더 억장이 무너집니다. 아버지는 매일 언제나 작은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마을 들머리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남이 보기에 모범적으로 생활하던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무서운 주인에 불과했을 따름입니다.
그러고 보니 작은아들을 간절히 기다리던 아버지와 달리, 큰아들은 동생을 기다리지도 않았습니다. 동생이 괘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동생이 떠나 있을 때 심한 기근이 들었으니 걱정을 조금이라고 할 만한데, 동정은커녕 오히려 냉정한 마음으로 동생을 단죄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형은 종처럼 일하면서 친구들과 놀려고 염소 한 마리를 아버지로부터 받은 적도 없습니다. 복음서를 잘 읽어보면 큰아들이 아버지에게 염소를 달라고 한 적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종으로 자처하고 아버지를 무서워했으니 염소를 달라고 말할 용기도 없었을 것입니다. 달라고 하지 않는데 어떻게 아버지가 줄 수 있겠습니까? 하기야 큰아들에게 친구 한 명이라도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날도 형은 들에 나가 하던 일을 마치고 집에 도착해 보니 이게 웬일입니까? 풍악이 울리고 사람들이 어울려 춤을 추고 축제 한마당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형도 함께 기뻐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형은 골이 잔뜩 났습니다. 그리고 하인을 불러 무언가 귓속말을 서로 주고받는데, 새초롬한 표정입니다. 하인이 집으로 돌아가고 혼자 남아 있습니다. 너무 불쌍한 모습입니다. 한참 있으니 뒤늦게 이를 알아차린 아버지가 나와서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죽었던 작은아들이 살아왔다고 기뻐하는 아버지는 술을 마셔 얼굴이 불그레합니다. 그런데 그 앞에 서 있는 큰아들은 화가 단단히 나 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동생을 단죄합니다. 그동안의 죄를 샅샅이 다 드러냅니다.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 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아버지를 나무라고, 단죄하는 듯합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작은아들을 향하던 그 인자한 얼굴을 큰아들을 향해서도 거두지 않습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큰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지 않고, 자신은 ‘종’을 자처하며 살아왔는데, 아버지는 변함없이 자비로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큰아들을 초대하십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큰아들이 마침내 기뻐하며 집으로 들어갔는지 궁금합니다.
올해 프란치스코 교황님과 함께 자비로운 하느님을 기리는 온 세상 교회는 즐기고 기뻐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