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

시인 이지향의 살가운방송 1회 - 시의 황제/ 시인 서정주님

namsarang 2019. 9. 8. 18:12


시인 이지향의 살가운방송 (첫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 백석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 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그 애가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업지르고 걸어 왔을 때 / 서정주


그 애가 샘에서 물동이의 물을 길어
머리 위에 이고 오는 것을 나는 항용 모시밭
사잇길에 서서 지켜보고 있었는데요

동이 깃의 물방울이 그 애의 이마에 들어
그 애 눈썹을 적시고 있을 때는
그 애는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갔지만
그 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업지르고
조심해 걸어와서 내 앞을 지날 때는

그 애는 내게 눈을 보내
나와 눈을 맞추고
빙그레 소리없이 웃었습니다

아마 그 애는 그 물동이의 물을
한 방울도 안 업지르고 걸을 수 있을 때만
나하고 눈을 맞추기로 작정했던 것이겠지요.




아라차차 암탉이 기합을 넣을 때

  /  이지향



모이를 주어도 암탉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낮추어 줍니다


팽그르르 쉴새 없이 

눈알을 굴리는 폼새가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숨을 죽이고 가만히 들여다 보니 

닭이 힘을 줄 때마다 항문이 

조금씩 벌어집니다


넓어진 구멍 사이로 상아빛 계란이 

얼굴을 갸웃 내밀다가 

금새 들어가 버렸습니다


닭은 다시 호홉을 가다듬더니 

까칠한 혓바닥을 길게 뽑으면서


아라차차 

기합소리 한 번 크게 질렀습니다


대가리의 붉은 볏도 빳빳이 

일어서면서 진통을 도왔습니다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두 손바닥을 닭의 항문가에 대고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순간 양수 묻은 달걀이 미끈둥하며 

손바닥이 이불인양 

벌렁 드러누워버렸습니다


촉촉한 알을 감싸쥐고 

급히 닭장문을 나서는데 


동그란 갈색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 매달고


암탉은 제 새끼를 

물끄러미 배웅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