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사제열전]
3. 강도영 마르코 신부(1863-1929)
33년 쉼 없는 사목자의 길을 가다
#1. 1896년 4월 26일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민 주교 집전으로 역사적 성품성사가 거행됐다. 조선 땅에서 처음으로 거행되는 사제서품식이었다. 수품자는 강도영(마르코) 정규하(아우구스티노) 강성삼(라우렌시오) 세 명. 이들은 1861년 6월 15일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후 조선교회에서 35년 만에 탄생하는 세 번째 조선인 사제들이었다. 강도영 신부와 정규하 신부는 같은 33살이었고, 강성삼 신부는 3살 적은 30살이었다. 수품 연월일이 같으면 나이 순에 따라 우선순위가 정해지는 관습에 따라 생일이 이틀 빠른 강도영 신부가 김대건, 최양업에 이어 한국교회 세 번째 사제로 기록됐다.
#2. 강도영 신부는 1863년 8월 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래 교우 집안이 아니었으나 열심한 고모 강 마리아의 권면으로 온 집안이 교우가 됐다. 먹과 벼루, 종이를 살 돈조차 없어 제대로 배우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강도영은 멱둥구미(볏짚으로 만든 그릇)에 담긴 콩 위에 한자를 썼다가 지웠다가 하며 혼자서 공부했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고모는 천주교 교육기관인 종현학당에서 배울 수 있도록 주선했는데, 강도영이 만 19살 때였다.
그로부터 1년 후 강도영은 신학생으로 선발돼 1883년 12월 7일 신학생들과 함께 말레이시아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그러나 페낭 유학생들이 열대 지방의 기후를 견디지 못하고 풍토병에 걸려 병사하는 일이 잇따르자 조선 유학생들은 1886년부터 다시 본국으로 귀국하기 시작했고, 강도영은 동료 신학생 5명과 함께 1892년 6월 20일 마지막으로 페낭을 출발해 다시 돌아왔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한 강도영은 한동안 폐병으로 고생하기도 했지만 1896년 마침내 동료 정규하, 강성삼과 함께 사제직에 올랐다.
#3.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서품식 당일 당시 갓등이(왕림)본당 관할이었던 미리내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키면서 강도영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발령했다. 그해 5월 20일 서울 주교관을 떠나 미리내 본당에 부임한 강 신부는 33년 동안 줄곧 미리내 본당신부로 지냈다. 부임 첫해에 관할 공소들을 다니며 첫 공소 순방을 마쳤을 때 양지ㆍ죽산ㆍ이천ㆍ광주ㆍ용인ㆍ양성 등지에 흩어져 있던 공소 수는 35개소, 전체 신자 수는 1779명이었다. 강 신부는 공소 시절 때부터 신부들이 와서 지내던 한옥을 임시 성당 겸 사제관으로 사용했으나 초창기에는 본당에서 지내는 시간보다는 공소를 순방하며 다니는 시간이 훨씬 더 많았다.
1904년 신자 수가 늘어나자 강 신부는 1353㎡(410평)의 부지를 매입한 후 돌로 된 성당을 짓기 시작해 1907년 252㎡(약 80평) 크기의 돌성당을 완공했다. 미리내 본당은 강 신부의 헌신적인 사목으로 점점 교세가 불어나 1913년쯤에는 신자 수가 3000명이 넘었다. 이에 따라 그해에 압고지본당(1930년 폐쇄됨)이, 1927년에는 남곡리본당(현 양지본당)이 분가했다.
#4. 강 신부는 사제 양성과 교육에도 열정을 쏟았다. 본당 재임 기간 중 모두 5명의 본당 출신 사제를 탄생시켰으며, 1907년에는 신축 중이던 성당 옆에 별도 건물을 지어 교리를 비롯해 한글 한문 산술 역사 등을 가르치는 해성학교를 설립했다. 해성학교는 단순한 교리학교를 넘어 애국계몽운동의 성격을 지니는 학교였다. 강 신부는 다른 공소들에도 비슷한 교리학교들을 열었다.
강 신부는 영농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공소를 순방할 때마다 그 지역 농부들을 통해 그 지역 작황을 파악하고 돌아와서 신자들에게는 수확 가능성이 좋은 작물을 심도록 권장했다. 감자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 감자씨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심도록 나무로 자를 만들어 나눠주고, 직접 뽕나무를 심고 농민들에게 양잠과 영농 기술을 가르쳐주었으며, 성당 인근에 해성제사공장(海星製絲工場)과 양잠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강 신부는 농촌개혁에도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이다.
#5. 미리내에는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묘가 있었다. 강 신부 재임 초기인 1901년 김대건 신부 무덤 발굴 작업이 이뤄져 김 신부 유해는 예수 성심신학교로 옮겨졌지만, 강 신부는 미리내가 한국 교회 첫 사제 김대건 신부가 묻혀 있던 곳임을 늘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러던 중 1921년 김대건 신부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김 신부 기념 경당을 짓는 문제가 논의되면서 기념 성당을 새남터와 미리내 어디에 세울 것인지 논란이 일자 강 신부는 미리내를 강력히 제시했다. 1925년 복자품에 오른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는 경당이 1928년 봄 미리내에 건립될 수 있었던 데는 강도영 신부의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6. 1929년 2월, 여느해와 마찬가지로 강 신부는 공소 회장 피정을 마치고 봄 판공을 주기 위해 공소를 순방하던 중 2월 28일 용인 한덕골에서 장티푸스에 걸렸다. 미리내로 돌아와 치료를 받았지만 병세는 악화됐고 마침내 그해 3월 12일 새벽 2시쯤 교우들이 기도를 바치고 있는 가운데 선종했다. 강 신부의 선종소식이 알려지자 교우들뿐 아니라 지방 유지들을 비롯해 비신자들까지도 강 신부의 애도하며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를 세우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고 한다.
강 신부는 선종 후 미리내 페레올 주교 묘와 김대건 신부 묘 옆에 안장됐다.
[평화신문, 제1031호(2009년 8월 16일),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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