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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내수 신부 |
슬프도다 슬프도다 사랑하온 우리형님 동지설한 형극중에 더운방은 어디두고 석자땅에 누웠는가 좋은초석 어디두고 뗏장속에 누웠는가 좋은성당 어디두고 이산중에 누웠는가 할일없이 쓸데없이 애련답답 슬픈마음 어디가서 원고할까 이성수(프란치스코)라는 사람이 형 이내수(아우구스티노, 1862~1900) 신부와의 사별을 슬퍼하며 지은 천주가사 '이별가'의 일부이다.
사제가 된 지 3년 만에 두메산골 성당에서 외로이 숨을 거둔 형님 신부에 대한 애끓는 심정이 절절히 묻어나는 이 천주가사는 옛날에 호남지방 신자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이내수 신부는 한국교회의 여섯 번째 사제이자 광주ㆍ전남지방에서 배출한 첫 한국인 사제다. 그러나 사제의 꿈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한 채 38살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며 눈을 감았다. 천주가사 전편에 동생의 비탄(悲嘆)이 흐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북 완주에서 태어난 이 신부는 19살에 신학생으로 선발됐다. 숱한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꿋꿋이 지켜온 가문에서 자란 터라 프랑스 선교사의 권유에 "예"하고 응답했다. 동생은 형이 사제가 되기 위해 고향을 떠나는 데 대해 "정결하온 우리형님/ 십구세에 결혼(하느님과의 결혼에 비유)할제/ 동정으로 수정하기/ 천주대전 허원이라"고 기뻐 노래했다.
이 신부는 다른 신학생 3명과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거쳐 말레이반도 페낭에 있는 국제공동신학교로 향했다. 당시 페낭신학교에서 수학하는 조선 유학생은 21명이었다. 그러나 낯선 기후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7명이 병사(病死)하자 선교사들은 서둘러 유학생들을 귀국시켰다. 이 신부도 이때 귀국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 계속 공부했다.
이 신부는 학업에 열중하던 1888년 봄에 큰 사건을 겪었다. 신학교 교수신부들과 북소문으로 소풍을 갔다가 대궐의 무너진 담장을 무심코 넘어 경내로 들어갔는데, 그게 '대궐 침입사건'으로 비화됐다. 이내수를 포함해 3명이 석달간 옥고를 치른 것도 모자라 사형 언도 소문까지 나돌았다. 종현성당(명동대성당) 건축을 둘러싸고 조정과 교회 사이에서 분쟁이 있을 때였다.
감옥 책임자는 "만일 교회가 성당 건축을 중단하지 않으면 교우들을 괴롭힐 것이니 선생 신부들을 설득시켜 하루 속히 건축을 중단케 하라"고 신학생들을 압박했다. 신학생들은 이 내용을 쪽지에 적어 비밀리에 선교사들에게 전달했다. 다행히 초대 프랑스 공사가 개입해 이들을 석방시켰다.
# 병약했던 사제, 결핵 앓아 이 신부는 몸이 허약했다. 16년간에 걸친 수련과 학업 끝에 1897년 12월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지만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에 있는 양로원에 가서 몸을 추스려야 했다. 그가 얼마나 병약했던지 사제품을 받고 고향에 내려가 가족과 첫 상봉한 것은 이듬해 6월이었다. 그는 고향에서 뮈텔 주교의 명을 받고 전라도의 첫 본당인 목포본당(현 신정동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했다.
그는 이어 우적동본당(전남 무안군 몽탄면 사천리)이 신설되자 4칸 집을 마련해 거처를 옮겼다. 우적동은 초가 대여섯 채 있는 산골인 데다 신자도 없었다. 하지만 영산강 뱃길을 따라 목포와 나주를 쉽게 오갈 수 있는 교통 요지였다. 주변에 넓은 농지와 큰 마을도 많았다. 특히 병인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와 담배농사를 짓고 옹기를 구워 내다파는 신자들이 멀지 않는 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그러나 결핵이 그를 괴롭혔다.
우적동 주민들은 결핵을 앓는 이 신부를 멀리 했다. 이웃집들은 이 신부 집을 거치지 않으려고 사립문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기까지 했다. 산골 성당에서 홀로 외로이 병마와 싸워야 했다. 그나마 유일한 기쁨은 나산과 노안 등지에서 이따금 찾아오는 예비신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영세시키는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신부는 선교 의욕에 불타 뮈텔 주교에게 교리서를 50권이나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신부는 시련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전교하러 다닌 덕에 외교인 수십 명을 입교시켰다. 하지만 병세는 점점 짙어졌다.
그는 뮈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일 내가 기적적으로 건강이 회복된다면 분신쇄골(粉身碎骨)하여 성교회를 위해 일하겠습니다. (중략) 9일 기도는 끝났으나 천주님께서 기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않고 천주 성의대로 이뤄지리라 할 따름입니다"고 밝혔다. 1900년 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불자 병세는 더욱 악화됐다. 이 신부는 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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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생 이성수(1912년 작고)가 형 신부의 죽음을 슬퍼하며 1901년에 지은 천주가사 「이별가」 원본. |
# "나의 믿음을 기억해다오" "건강이 악화돼 사람들의 영혼을 구하는 전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을 가르칠 수도 없고, 항상 누워 지냅니다. 경본도 못보고 미사도 못 지냅니다. 미사 때 영성체 후 성체를 세 번이나 토했습니다. 그뒤로 감히 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1900년 10월 8일 뮈텔 주교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에서) 12월 20일 아침, 임종 순간이 다가오자 인근 마을 교우들이 급히 모여 들었다. 이 신부는 제단의 십자가를 떼어 갖다 달라고 했다. 이 신부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성호를 그었다. 이어 병구완을 해준 사람에게 십자가를 건넨 뒤 "나 때문에 고생을 하였구나. 내가 죽은 뒤 이 십자가를 가져라. 그리고 나의 믿음을 기억해다오"라고 힘겹에 말했다. 이 신부는 그날 저녁 신자들에게 "위주(爲主, 주님을 위함)하라"고 당부하고 고요히 눈을 감았다.
목포본당 드예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그의 부음을 전하는 편지에서 "그는 10월 16일 이후로도 열두 번이나 미사를 드렸습니다. 모든 일을 주님 뜻에 맡길 뿐이라며 유서는 작성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열심하고 신중한, 그리고 열정적인 사제를 잃은 것입니다"고 말했다.
전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는 "비교적 늦게 출발한 이 지방 선교는 이내수 신부를 통해 조선교회, 즉 말기 박해시대 교회와 그 뿌리가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동생의 '이별가'는 비탄조로 끝나지 않는다. 형 신부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려는듯, 신망애 삼덕을 통해 이르게 되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면서 신앙을 권유하고 있다.
"세상영화 생각말고/ 천당영화 생각하소/ 천주십계 굳이지켜/ 진복팔단 생각하고…."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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