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대한민국 제1호

첫 필화, 1955년 매일신문 최석채

namsarang 2009. 10. 29. 20:58

[대한민국 제1호]

첫 필화, 1955년 매일신문 최석채

 

1955년 9월 14일 오후, 대구매일신문사에 곤봉과 망치를 든 괴한 20여명이 뛰어들었다. 이들은 욕설과 고함을 지르며 인쇄 시설과 집기를 때려부쉈다. 만류하던 직원들도 곤봉과 주먹 세례를 받았다. 이날 밤 삐라가 시내 곳곳에 뿌려졌다. 신문사를 '이적단체'로, 자신들의 행위를 '애국단체의 의거'로 규정하는 성명서였다. 우익단체 국민회 간부와 청년들이 저지른 일이었다.

이들이 신문사에 몰려간 것은 전날 최석채주필이 쓴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때문이었다. 대구에 오는 고위층을 환영하기 위해 어린 중고등학생들을 동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지적한 내용이었다. 이승만 대통령 측근인 임병직이 대구를 방문하는 날, 무더위 속에 학생들을 동원한 것을 빗댄 사설이었다. 경찰은 테러범 대신 최석채를 국가보안법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이상한 논리까지 들먹여 여론의 공분을 샀다. 고삐 풀린 자유당 독재가 빚어낸 희극이었다. 최석채는 사건 한 달 만에 불구속기소로 석방됐고, 이듬해 대법원까지 올라가 무죄가 확정됐다. 해방 후 필화(筆禍)사건이 대법원까지 가서 판결받은 첫 사례였다. 이 때문에 이 사건을 대표적인 필화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 최석채(사진 왼쪽),         함석헌(사진 가운데),      김지하(사진 오른쪽).

해방 직후에는 좌우 이념대립이 격렬해지고, 미 군정과 충돌하면서 좌익 신문이 정간·폐간되는 등 크고 작은 필화사건이 잇따랐다. 자유당 독재가 말기로 치달으면서 함석헌이 1958년 '사상계' 8월호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겪은 필화도 유명하다. 6·25가 미소대결로 벌어진 '꼭두각시의 놀음'이었다고 쓴 이 글로 함석헌은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가 20일 만에 석방됐다. 김지하의 '오적'(五賊)으로 박정희 정부에 직격탄을 날린 곳도 '사상계'였다. 1970년 5월호에 실린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 박정희 정부 지배층의 부정 부패를 통렬하게 풍자했다. 이 사건으로 '사상계'는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 처분을 받았고, 결국 잡지는 문을 닫았다. 소설가 남정현의 '분지', 해직교수 이영희의 '우상과 이성' '8억 인과의 대화'도 박정희 시대의 대표적 필화사건으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1980년대 들어서는 소설가 한수산이 신문 연재소설로 신군부에 밉보여 서빙고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해방전후사의 인식' '태백산맥' 등 금서 딱지가 붙은 책들은 베스트셀러로 떠올랐다. 최근에도 국방부가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금서목록에 올렸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책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필화'(筆禍)는 언제나 흥행수표처럼 통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