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청년, 타는 목마름으로 "대한 독립 만세"... "뿌리 없는 나무가 어찌 자라고, 나라 없는 백성이 어디서 안심을..." 의병부대 결성해 일본군 수비대와 맞서지만 일본군 및 상인 포로 석방... 전투 후 장맛비 맞으며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동료들에 대세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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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년 안중근 의사가 망명해 구국투쟁을 벌이던 당시 블라디보스토크 시가지로, 한인들의 밀집지역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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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의 단지혈맹을 기려 제작된 '대한의사 안중근공 혈서' 엽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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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는 1908년 당시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하던 해조신문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인심결합론'을 발표했다. 해조신문은 블라디보스토크의 국한문식 이름인 해삼위(海蔘威)에서 조선인들이 발행한다는 뜻에서 각각 첫 글자를 따 제호를 지은 신문으로, 안 의사는 인심결합론을 통해 국권 회복을 외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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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와 단지 동맹 동지였던 황병길과 백규삼, 그리고 국내 진공작전의 동지였던 엄인섭 의병장이 등장하는 사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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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중근 의사가 1908년 국내 진공작전을 벌일 때 함께 참여한 엄인섭 의병장과 공동작전을 벌인 홍범도 의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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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연해주 의병의 본거지였던 카라스키노 원경. |
28살 대한 청년 안중근은 간도를 거쳐 연해주로 떠난다. 1907년 7월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을 협박해 '정미늑약'을 체결하고,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뒤 군대를 해산한 직후였다.
국권 회복을 위한 망명의 계기는 우연찮게 이뤄졌다. 부친 안태훈(베드로)의 벗이던 김 진사가 1907년 봄 안중근을 찾아와 "그대의 기개를 가지고 지금 이처럼 나라 정세가 위태롭게 된 때에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가"하고 묻고, "간도와 블라디보스토크에 한국인들이 살고 있으니 거기서 뒷날을 도모하라"고 충고한 게 계기였다.
이같은 권유에 "가르치신 대로 하겠습니다"하고 답변한 안중근은 정미늑약으로 사태가 급박해지자, 가족과 동생 정근(치릴로)ㆍ공근(요한) 등과 헤어져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초기 한인사회 중심지 크라스키노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렀다.
#동지들 규합해 의병 모집 나서
그는 의병을 조직해 일제에 대항하려 했다. 이 때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난 인물이 1902년 5월 간도관리사로 청군과 여러차례 교전했고, 러ㆍ일전쟁 때는 러시아군과 함께 일군과 싸운 이범윤 장군, 크라스키노 한인 사회 유지이자 거부인 최재형 등이었다. 이들의 후원으로 엄인섭, 김기룡 등 동지를 규합하고 동시에 의병 모집에 나섰다.
당시 안중근의 애국적 연설에 감동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찌 자라날 수 있을 것이며, 나라 없는 백성이 어디서 안심하고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만일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다면 설사 일본이 전쟁에 패한다 해도 우리 조국은 다시 다른 도둑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의병을 일으켜 국권을 되찾고 독립을 굳건히 해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 의병이 결성됐다. 총독에 이범윤, 총대장에 김두성, 대장에 전제덕ㆍ김영선ㆍ김모, 좌영장에 엄인섭, 우영장에 안중근을 추대한 의병부대는 200~300명을 거느린다.
국내 진공에 앞서 안중근은 함경북도 무산에 진을 친 의병장 홍범도 부대와 공동작전을 꾀하려 했으나 일본군 수비대에 발각되면서 구사일생으로 크라스키노에 귀환한다.
이에 안중근이 사실상 이끄는 의병부대는 1908년 5월 단독으로 두만강 최하단 함북 경흥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 일군 2명을 사살하고 수명을 부상시키는 전과를 올린다.
두 달 뒤 제2차 국내 진공이 이뤄졌다. 안중근은 엄인섭, 백규인, 이경화, 김만용, 강창두, 최천오 등과 함께 부대를 나눠 두만강을 건너 함북 경흥과 신하산 부근으로 진공한다.
세 차례 교전에서 일본군 50여 명을 사살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일본군 기지가 있는 회령으로 진격해 3000여 명의 일본 수비군을 물리치는 등 13일간 30여 차례 교전을 승리로 이끈다.
이 때 사로잡은 일본군과 상인 10여 명이 목숨을 살려달라고 빌자 안중근은 국제공법에 따라 인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에서 포로들을 석방한다. 신앙인이었기에 가능했던 결단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의병부대엔 내분이 일어난다. 이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끓었고, 일부는 부대를 나눠 떠나버렸다.
포로를 석방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안중근 부대는 일본군 기습으로 대부분 죽거나 달아나고 만다. 제3차 의병전투였다. 석방한 포로들에 의해 부대 위치가 일본군에 알려졌기에, 갑작스런 기습공격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다. 패잔병 2명과 안중근은 맨발로 장맛비를 뚫고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무려 한달 보름만에 크라스키노에 돌아온다. 당시 함께한 두 동지에게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고 대세를 준 것은 그의 두터운 신앙심을 보여준 대목이다.
#온 몸을 내던져 '구국의 길'로
귀환 후 안중근은 다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모집하려 했지만, 일본군 포로 석방과 3차 전투 패배에서 충격을 받은 교포들의 격렬한 비판으로 뜻을 이루지 못한다. 안중근의 상관인 김두성은 이에 의병부대를 해체하고 별도 특파독립부대를 조직케 함으로써 자유롭게 활동할 것을 허락했다.
1901년 1월 상심한 채 다시 크라스키노에 돌아온 안중근은 인근 카리 마을에서 동지 12명과 함께 '구국 단지 혈맹'을 맺는다. 일심동체가 돼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 위해서였다.
각자 왼손 약지를 끊어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쓰고 하느님께 기도한 뒤 '대한 독립 만세'를 세 번 불러 언젠가 기회가 오면 다시 의병을 일으켜 나라에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다.
의거 이후 일본측 수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단지혈맹에 참여한 동의단지회 동지는 안중근을 비롯해 강순기ㆍ정원주ㆍ박봉석ㆍ유치홍ㆍ김백춘ㆍ김기룡ㆍ백규삼ㆍ황병길ㆍ조순응ㆍ김천화ㆍ강창두 등이었다. 대부분 20~30대였다. 이들의 단지혈맹을 기념하는 비석이 2001년 10월 러시아 정부 협조로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 의해 지금은 황무지로 변한 카리 마을에 세워졌다.
온몸을 던져 구국의 길로 향한 '단지 구국 혈맹'의 취지문은 지금 읽어도 가슴을 뜨겁게 한다.
"2000만 동포가 일심단체(一心團體)해 생사를 돌보지 않은 연후에야 국권을 회복하고 생명을 보전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동포들은 다만 말로만 애국이니 일심단체니 하고, 실제로는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단체가 없으므로 특별히 한 모임을 조직하니 그 이름을 동의단지회라, 우리 일반 회우가 손가락을 끊음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라 하겠으나 그 첫째는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빙거(憑據)요, 둘째는 일단체하는 표(標)라, 오늘 우리가 더운 피로써 청천백일 하에 맹세하니, 지금부터 시작해 아무쪼록 이전 허물을 고치고 일심단체해 마음을 변치 않고 목적에 도달한 후에 태평 동락을 만만세에 누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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