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액체이자 희생과 진실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고혈압과 심장병 예방에 좋다는 의학적 보고가 보도되면서 인기를 끌고있는 붉은색 포도주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매우 인기 있다. 국내 전체 포도주 소비의 90%가 붉은색 포도주라고 한다.
옛날 유다인들은 "와인은 약(藥) 중에서 으뜸가는 약"이라고 했다. "와인이 부족한 곳이라야 약품이 필요하다"는 속담도 있다. 그러나 와인이 심장질환의 예방에 효과가 있다고 해도 과도하게 마시면 그것은 바로 독이 돼 우리의 건강을 송두리째 망치게 된다. 물론 이 말은 와인에만 국한되는 말이 아니고 모든 술에 해당된다. "술은 적당히 가끔 마셔야 약이 된다"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하는 금언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물이 귀해 포도주는 사치품이기보다는 필수품이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포도주도 신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포도주는 생명의 액체이며, 희생과 진실과 활력을 상징한다.
성경에는 포도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포도는 포도나무, 포도원, 포도주, 건포도, 포도즙 등 다양한 표현으로 등장하는 귀중한 식물이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도를 평화와 축복 그리고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구약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가나안)을 포도에 비유하기도 했다. 또한 포도는 가나안 땅에서 밀과 보리, 무화과와 석류, 올리브 나무와 대추야자와 함께 축복받은 7가지 식물 중 하나였다(신명 8,7-10).
포도는 하느님 자비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포도를 수확할 때 약간을 남겨놓고 바닥에 떨어진 포도는 줍지 않았다. 가지에 남은 포도와 땅에 떨어진 포도는 가난한 사람들 몫이었다(레위 19,10).
신약에서 하느님은 '포도원의 주인'이라 하고, 예수님은 '포도원의 참 포도나무'라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친밀한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하기도 했다(요한 15,1-3 참조). 포도의 가장 큰 상징은 우리 죄를 속죄하시려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포도주로 표현됐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행한 최후 만찬에서 포도주는 언약의 피로 상징됐다(마태 26, 26-28).
포도주는 많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지만, 성찬 전례에서의 포도주는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미사 중에 거행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새로운 계약을 맺기 위해 흘리시는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성사적 표지이다(마태 26, 27-29).
포도주에 소량의 물을 섞는 것은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로마인들이 포도주 농도를 낮게 하거나 맛이 더 나도록 물을 섞어 마신 데서 유래한다(2마카 15,39).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는 신 포도주에 물을 타서 노동자의 음료수로 마셨다. 로마병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드린 신 포도주는 당시 노동자들이 마시던 음료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미사주는 포도주를 사용하고 있으니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포도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미사 중 포도주에 물을 조금 섞는 것은 인간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뜻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일치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함을 의미하기도 한다(2베드 1,4), 전례 규정에 따르면 미사 때 사용되는 포도주는 다른 것이 섞이지 않은 순 포도주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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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델베르그 성 지하에 있는 대형 포도주 통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