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고대 희랍인들은 무릎을 꿇는 것은 자유인에게 어울리지 않으며 야만인이나 하는 자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릎을 꿇는 것은 아주 긍정적 의미도 담고 있다. 억지로 하는 비굴한 자세가 아니라, 상대방에 대한 극진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자세이다.
인간이 하느님 앞에 나설 때에는 자연히 경배의 자세로 무릎을 꿇게 된다. 무릎을 꿇는 행위 안에는 모든 기도가 내적으로 지녀야 할 기본적 자세를 외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미사나 전례, 기도에서 무릎 꿇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동작이다. 우리나라 전통 예절 중 하나인 큰절을 할 때도 무릎 꿇는 동작을 먼저 한다. 이처럼 무릎을 꿇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낮추며 존경과 겸손을 드러내는 동작이다. 무릎을 꿇는 자세는 속죄, 통회의 의미도 있다. 또한 양 무릎을 꿇는 것은 자기보다 강한 자에 대한 굴복을 나타낸다. 특히 신적 존재에게 경배할 때에는 이 자세를 취했다. 앗시리아에서는 왕도 제단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덜덜 떠는 무릎의 흔들림은 불안과 두려움 혹은 연약함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죄책감의 표시, 간절히 바라는 동작, 공손함의 표현으로 간주했다. 무릎을 꿇는 행위는 무엇보다 기도하는 자세이다. 솔로몬은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펼치고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기도했다(2역대 6,13). 에즈라는 저녁 제사 때에 단식을 그치고 일어나서, 의복과 겉옷은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 번민의 기도를 올렸다(에즈 9,5).
예수님께서도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올리브 동산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셨다. "그러고 나서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루카 22,41). 예수님이 무릎을 꿇은 자세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염원하는 기도를 바치는 예수님은 무엇이 참된 자유인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또한 무릎을 꿇는 것은 경외심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필리 2,10-11).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감사와 경배의 표시로써 무릎을 꿇는다. "이렇게 대답하여라. '그것은 주님을 위한 파스카 제사이다. 그분께서는 이집트인들을 치실 때,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을 거르고 지나가시어, 우리 집들을 구해 주셨다.' 그러자 백성은 무릎을 꿇고 경배하였다"(탈출 12,27).
또한 무릎을 꿇는 것은 간절히 무엇을 바라는 사람의 태도이다. 사람들은 예수님 앞에서 자비를 청할 때 무릎을 꿇는다. 나병을 고치기를 바라는 사람(마르 1,40), 아들의 간질병을 치유하기를 바라는 부친 등이 그렇다(마태 17,14-15). 초기 유럽 교회에서는 번민, 혹은 속죄의 성격을 가진 날에만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중세 말부터는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의 기본자세가 됐다. 겸손과 통회라는 상징적 의미를 가진 무릎을 꿇는 동작은 시대가 흐름에 따라 보다 심오한 흠숭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첨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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