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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는 피

namsarang 2009. 12. 24. 21:15

[ESSAY]

끓는 피

  • 이희범 STX에너지 회장·前 산업자원부장관
     이희범 STX에너지 회장·         前 산업자원부장관

겨울엔 통나무 다리를 놓는데
어느 해인가 겨울 장마로 다리가 끊어졌다.
강물 중간을 지나자 갑자기 다리가 없어졌다.
옷을 벗어 책가방과 함께 꽁꽁 묶어
머리에 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내게 고향이 어디냐 물으면 좀 복잡하게 설명한다. "청량리서 중앙선 타고 네 시간쯤 달린 후 다시 배 타고 한 시간가량 가서 물 밑으로 50m 잠수해 가면 고향이라고."

내가 대학을 다닐 무렵 안동댐으로 고향이 수몰됐다. 달빛을 쳐다보며 미래를 꿈꾸던 대청마루는 물론 앞뜰 논과 밭이 물속에 잠긴 지 40년이 돼간다. 동네 어른들이 더위를 식히며 세상사를 논하던 아름드리 느티나무도, 풍년을 기원하며 제사를 모시던 마을 수호신도 물속으로 사라졌다.

지금은 웬만한 시골에도 버스가 다니고 마을길도 넓어졌으나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우리 고향은 험하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초까지 집앞에 신설된 분교에 다녔다. 한 학년 학생은 모두 10여명, 4학년까지 40여명 남짓했다. 처음 몇 년간 교실은 동네 서당을 이용했고 한명뿐인 선생님은 삼촌이었다. 교과서는 학년에 한두명만 가지고 있어 돌려가며 읽어야 했다.

4학년 2학기 때 나는 면 소재지에 있는 본교로 전학했다. 집에서 시오리가량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강을 두개나 건너야 했기에 비만 오면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당시엔 웬 늑대가 그리 많았는지 군부대가 동원되어 늑대를 쫓아내기도 했으니 등굣길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혼자 가기 무서워 어머니가 따라나서기도 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겨울엔 통나무 다리를 놓는데 어느 해인가 겨울 장마로 다리가 끊어졌다. 강물 중간을 지나자 갑자기 다리가 없어졌다. 옷을 벗어 책가방과 함께 꽁꽁 묶어 머리에 이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물은 예상보다 깊어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한 손으로 옷과 가방을 부추기며 개헤엄으로 물을 건너는데 강물엔 얼음이 둥둥 떠다녀 이를 피하는 일도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런 악조건 속에 나는 전학한 지 1년 만인 5학년 때 전교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다.

새삼 코흘리개 시절 자랑을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 살림도 어쩌면 나와 같이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성공한 대표 사례로 들 수 있다. 지구촌 230여 국가 중 우리나라는 압축성장 모델로 분류된다. 아프리카 중남미 중동에서도 한국을 배우자는 열기는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내가 사외이사로 일하고 있는 남아공의 국영전력회사인 에스콤은 금년 초 한국을 벤치마킹 대상국으로 분류해 놓고 있다.

1964년 우리나라가 수출 1억달러를 돌파할 때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모잠비크도 같이 1억달러 테이프를 끊었다. 이들 국가의 작년도 수출은 각각 16억달러와 27억달러였다. 1971년 우리 수출이 10억달러를 기록할 때 필리핀포르투갈도 함께 10억달러를 넘었으나 이들 국가의 작년도 수출은 490억달러와 560억달러였다. 좀 더 나아가 1977년 우리가 100억달러 수출을 돌파할 때 인도네시아브라질도 함께 100억달러 수출을 기록했으나 이들 국가의 작년도 수출은 1천억달러대에 머물렀다. 우리 수출이 4220억달러인 데 비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세계금융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올해 세계 9위 수출국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얼마 전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는 한미우호협력상을 받는 자리에서 "1950년 6월 25일,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할아버지 생일잔치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한국에서 전쟁이 났다'라는 뉴스를 듣고 지도를 뒤졌으나 한국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했다. 그런 한국에서 대사를 역임했고 또 상까지 받으니 얼마나 영광스러우냐"는 것이 수상소감이었다.

1970년대 해외출장시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면 좀 유식한 사람도 두 번째 질문은 "남에서 왔느냐? 북에서 왔느냐?"였다. 자존심이 상한 것은 물론이었다. 이제는 해외에 나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바로 휴대폰을 꺼내면서 "IT의 나라"로 부러워한다. 두 번째 질문도 과거와 달리 "요즘 북쪽은 어떠냐?"로 바뀌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한국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는 것일까? 물론 우리 상품과 기술력이다. 우리는 1959년 진공관식 라디오를 처음 조립한 지 50년 만에 세계 최고의 IT국가가 되었다. 세계인의 네명 중 하나는 우리가 만든 휴대폰을 쓰고 있고 D램 반도체는 세계시장의 57%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가 만든 자동차는 세계 200여개국에 수출되고 있고 세계 최고의 호화여객선도 우리 손으로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이 짧은 시간에 압축성장을 이룩한 것은 기업인들의 기업가 정신과 정부의 적절한 정책, 그리고 묵묵히 일하는 근로자들의 합작이었다. 여기에 세계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내려는 과학기술자와 엔지니어들의 끓는 피가 더해졌다. 얼마 전 미국의 사이언스지는 "1970년대 한국 경제 발전의 저변에는 엔지니어들이 공장에서 헬멧을 쓰고 있어도 조국을 발전시킨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여대생들에게 엔지니어는 신랑 후보 1순위였다"라고 평가했다.

미국이 최고의 평등사회로 알려져 있으나 부르킹스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최하위 20% 소득계층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최상위 20% 계층에 편입될 가능성은 6%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빈부격차가 중세의 신분처럼 고착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아직도 기회의 땅이다. 누구든지 기업가가 될 수 있으며 자기 노력에 따라 최고의 공직에도 이를 수 있고 세계 최고의 과학자도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