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외국 장묘문화는 천차만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묘지에 수십 평을 사용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오히려 현재 선진국에선 화장률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리스도교 문화권 유럽에서도 화장률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굳이 매장을 하더라도 넓고 높게 쌓아올린 봉분은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죽어 묻히더라도 어떠한 형태로든 생존을 계속한다는 생각을 많은 민족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러한 사후 생존은 또 시신이 어떤 식으로 처리되느냐에 달렸다고 여겼다.
구약성경에는 어느 곳에 묘를 써야 한다는 규정이 따로 없다. 그런데 기원전 6세기 유배 이후에 정결 규정이 특히 강화되면서 시신은 물론 무덤도 부정한 것으로 분류했다.
성경 시대에 죽음 후 묘지에 제대로 묻히지 못하는 것은 큰 불행이었다(이사 14,19). 패전했을 때 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시신이 뒹구는 것을 가장 큰 불운으로 여겼다(이사 34,2-3). 그래서 죽은 자가 묘지에 인장되지 못하는 것을 하느님께서 큰 죄인에게 내리시는 벌이라고 여겨(신명 28,26) 전쟁에서 진 적군도 묻어주었다(1열왕 2,3).
또한 죽은 자를 장사지내 주는 일은 큰 덕행이었다. "배고픈 이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이들에게는 입을 것을 주었으며, 내 백성 가운데 누가 죽어서 니네베 성 밖에 던져져 있는 것을 보면 그를 묻어 주었다"(토비 1,17).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후 삶이 매장과 밀접히 연관됐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인들은 특별한 경우 외에는 본래 화장을 하지 않았다. 시신을 불태우는 것은 화형에 처할 때나(창세 38,24) 전염병이 있을 때 뿐이었다. 시신을 안치하는 규정은 이스라엘에는 없었다.
매장할 때에는 악취를 없애느라고 무덤 안에도 향을 피우고 향료를 태웠다. "사람들은 그가 자신을 위하여 다윗 성에 깎아 놓은 무덤에 그를 묻었다. 그들은 향 제조술에 따라 만든 온갖 향료로 가득 채운 침상에 그를 눕히고, 그를 위하여 아주 큰 불을 켜 놓았다"(2역대 16,14).
묘실 안에 있던 유골은 어느 정도 기간이 지나면 함에 넣고 묘실 벽에 판 구멍에 모셔놓아 다음 사람을 위한 장소를 마련했다. 묘지는 일반적으로 성이나 동네 밖에 마련했다. 사후에도 생존이 지속된다는 생각으로 무덤을 죽은 이들의 집으로 여겨 준비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인들이 살던 팔레스티나 땅은 주로 바위가 많은 산악 지방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자연 동굴이나 인공으로 판 굴을 묘지로 이용하기도 했다.
생전에 새 무덤을 마련한다는 것은 부유한 사람만이 할 수 있었다. 보통 묘지는 가문 등이 상당 기간 함께 사용했다. 따로 가족묘를 마련할 수 없었던 서민들은 그냥 땅에 묻기도 하고 공동 무덤을 이용했다. "그리고 아세라 목상을 주님의 집에서 예루살렘 밖 '키드론 골짜기'로 끌어내다가, 그것을 '키드론 골짜기'에서 태우고 가루로 만든 다음, 서민 공동묘지에 뿌렸다"(2열왕 23,6 참조).
예수님 시대에는 그리스와 로마의 건축과 예술을 본받아 무덤 입구를 대문처럼 꾸미기도 하고 여러 가지 기념물로 치장하기도 했다(1마카 13,25-30).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요 인물들을 성이나 마을 안에 묻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임금들 무덤은 예루살렘 안에 있는 왕궁의 부속지에 마련했다(1 열왕 2,10).
예수님 시대에는 향이 든 병과 향료와 함께 많은 등잔을 매장했다. 이처럼 무덤이나 부장품도 풍속이나 시대 상황에 따라 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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