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위험에 처한 주인을 대신해 목숨을 잃은 충성스런 개 이야기가 가끔 언론에 나온다. 불이 난 집에서 자고 있는 주인을 깨우고 자신은 불에 타 죽은 개 이야기를 TV에서 본 적이 있다. 개처럼 충성스런 동물도 드문 것 같다. 요즘처럼 희생을 모르는 이기적 세상에서는 꿈같은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예로부터 희생은 교환과 연결되는 개념으로 생각됐다. 즉 신에게 희생물을 바치면 신에게서 그 이상의 것을 받는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인간이 신에게 올리는 희생 제물은 주로 첫 번째로 수확한 과실, 최초로 태어난 동물이나 첫 아이였다. 인간을 산 제물로 바치는 고대 관습은 신의 노여움을 풀기 위한 희생 제사의 최고 형태였다.
그러나 점차 사람 대신 동물을 희생 제물로 드리게 됐다. 근대에 와서는 윤리적 행위를 희생으로 여기기도 했다. 희생은 점차 인간사회 질서 유지와 자신 생명의 안녕을 위해 필요한 덕목이 된 것이다.
성경은 희생을 자주 언급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빈손으로 자신에게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을 인간처럼 생각하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너희는 무교절을 지켜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대로, 아빕 달 정해진 때에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한다. 그달에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아무도 빈손으로 내 앞에 나와서는 안 된다"(탈출 23,15).
하느님께는 첫 열매를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탈출 13,2). 최초로 태어난 남자 아이는 하느님의 소유물로서 대속하지 않는 한 하느님 백성의 처소에 머물 수 없다(탈출 13,13).
그러나 하느님은 페니키아나 가나안의 신들과는 반대로 인간이 희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대체로 구약의 희생에는 피의 희생으로서 제물을 죽인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하느님과 화해하기 위해, 제사를 지낼 때는 제물이 될 동물을 희생시켜 봉헌했다. 죄를 범한 사람이 흠 없는 희생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은 자신의 죄를 그 제물에게로 옮기기 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피를 흘리지 않는 곡식물을 희생으로 드리는 경우에는 고운 가루로 만들었다. "누가 주님에게 곡식 제물을 예물로 바칠 때에는, 고운 곡식가루를 바쳐야 하는데, 거기에 기름을 따르고 유향을 얹어…"(레위 2,1). 그러나 점차 겉으로 드러나는 희생보다는 마음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저의 기도 당신 면전의 분향으로 여기시고 저의 손 들어 올리니 저녁 제물로 여겨 주소서"(시편 141,2).
신약에서 예수님은 최후 만찬에서 구약의 희생 제물 대신 자신을 구원의 희생으로 바쳤다. 십자가상에서 피 흘리는 모습으로 자신을 바치셨던 것이다(요한 1,29).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1코린 15,20). 하느님이 믿는 자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피의 산 제물이 아니라 영적인 산 제물이다(1베드 2,5). 그 사람의 전 존재를 바친다는 완전한 봉헌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로마 12,1). 진정한 희생은 마음의 온전한 봉헌이 전제돼야 함은 물론이다. 또한 실제적 행위로 연결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희생은 공허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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