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물은 인간 생명을 위해서나 동식물을 위해서나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래서 초기 문명은 물을 쉽게 공급받을 수 있는 곳에서 발달했다. 예로부터 물에는 성스러운 힘이 있다고 여겨졌다. 또한 옛날 사람들은 물에는 몸과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내는 영적 위력이 있다고 믿었다.
성경의 땅인 팔레스티나 지역은 물이 귀하다. 북쪽에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거기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요르단 강이 있다. 그러나 이 강은 비가 얼마 내리지 않고 요르단 계곡을 관통해 사해(死海)로 흘러든다. 그런데 이스라엘인들이 살던 곳은 주로 이 계곡의 서쪽 산악 지방이었다. 다른 하천들도 규모가 작고, 많은 하천이 우기에만 물이 있다.
성경에서 물은 생명의 원천, 소생케 하는 힘이나 하느님 은총의 상징한다. 또한 성경에서 물은 정화의 의미도 지닌다. 그래서 시체를 만지거나 해서 부정을 탄 사람은 잿물에 몸을 씻어 부정을 벗어야 했다(민수 19,1-22).
물이 귀한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물을 얻는 문제는 농사짓는 사람들과 양치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분쟁의 핵심이었다(창세 4,2). 물은 생명을 유지시키는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노아의 홍수에서 보듯이 심판을 상징하기도 한다(창세 7장). 하느님께 불충실할 때 가뭄이나 홍수가 징벌의 도구로 자주 등장한다(1열왕 17,12).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지면 하늘은 비를 내리지 않아 땅을 메마르게 한다(신명 11,17).
그러나 물은 무엇보다 더러운 것을 씻어 청결하게 한다(에제 16,4-9). 이런 물의 사용은 손님을 접대할 때 주요한 관습의 하나였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창세 18,4).
신약에서 물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생명수이다. "모두 똑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따라오는 영적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셨는데, 그 바위가 곧 그리스도이셨습니다"(1코린 10,4). 그리스도 자신이 영원한 생명의 물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4).
물의 상징적 의미는 그리스도교 신자 세례에서 잘 나타난다. 그런데 세례는 신체가 아니라 영혼과 양심 그 자체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세례는 몸의 때를 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입니다"(1베드 3,21).
이처럼 생명수로서 물의 상징적 의미는 세례 안에서 아주 충만하게 표현된다. 세례의 물을 통해 신자들은 영혼의 죄를 씻어 버리고 그리스도 자녀로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세례 때에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은 세례를 받는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로마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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