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사제열전

(14) 윤을수(1907~1971) 신부(상), 한국의 첫 박사 신부

namsarang 2010. 2. 7. 14:30

(14) 윤을수(1907~1971) 신부(상), 한국의 첫 박사 신부


번역, 출간, 연학 등 학자적 자질 꽃피워

   1939년 7월 프랑스 파리대학. 32살 동양인이 「한국유교사론」이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천주교회 첫 박사 사제인 윤을수(라우렌시오) 신부였다. 한국인들에게 유교 사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제시하려고 하는 의도를 저변에 깔고 있는 이 논문은 한국 유교사를 통시적으로 훑어보면서 특히 불교와 대비해 그 정치 사회적 영향을 짚어내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도 포착할 수 있다. 논문에서 제시하는 유교 사상이 가톨릭 사제인 저자의 삶과 사상에 어떤 관련이 있나 하는 것이다. 인보성체수도회 새감연구소장 한영순 수녀는 이렇게 표현한다. "「한국유교사론」에 나타난 한국사상에 대한 가톨릭적 이해는 인간중심 사상에 대한 이해와 사회복지 사상에 대한 것이다."(「한국유교사론」 해제 중에서)

 인간중심 사상과 사회복지 사상. 이 두 가지는 윤을수 신부의 생애를 관통하는 큰 맥이었다.
 윤을수 신부는 1907년 11월 7일 충남 예산군 고덕면 용리에서 부친 윤창규(이냐시오)씨와 모친 임골룸바씨의 2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윤씨는 개성에서 장사를 하다 파산해 가족과 함께 충청도로 내려왔으며, 행상을 다니면서 돈을 벌어 나중에는 '예산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산을 불렸다.

 윤 신부는 어린시절 장난기가 심했지만 활달하고 영특했고 고집도 셌다고 한다. 집안은 교우가 아니었지만 형 갑수(시몬)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닐 때 교우 집에 하숙을 한 것이 계기가 돼 신앙을 갖게 되면서 온 집안이 가톨릭 신앙을 갖게 됐다. 아버지 윤씨는 '천주교에 입교한 후에 주님 은혜로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고 말하곤 했을 정도로 신앙심이 두터웠으며 부지런하고 자선심도 많은 후덕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7살 때쯤 당진 원머리로 이사했고, 이곳에서 라리보 신부에게서 교리를 배우고 복사도 서기 시작했다. 집안이 다시 당진 아모골로 이사하면서 형편도 훨씬 나아졌을 때인 1920년 9월 13일 서울 용산신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동기는 모두 38명이었고 그 가운데는 훗날 평양교구장을 지낸 홍용호 주교와 교회사화가(敎會史話家)로 유명한 오기선 신부가 있었다.

 신학생 시절 그는 특히 오기선 신부와 절친했다. 학교 성적에서도 앞서거나 뒷서거니 다툼한 두 신학생은 엄격한 신학교 규칙을 어겨가며 남몰래 불어 공부를 함께 하다가 들켜 혼쭐이 나기도 했다.
 독학으로 배운 불어에 눈이 트이자 그는 토마스 아 켐피스가 지은 중세기 대표적 신심 서적 「준주성범」 불어판을 구해 번역하기 시작했다. 번역작업은 나중에 사제품을 받은 후 라틴어판을 대본으로 삼고 불어판을 참고해 마무리했다. 1942년 성신대학(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초판이 나온 이후 일반 신자들을 위한 번역서가 1955년 가톨릭출판사에서 나왔다. (윤 신부는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지내며 이 책을 다시 번역하면서 직접 쓴 묵상자료를 곁들였는데, 2004년 「그리스도를 따라」라는 제목으로 가톨릭출판사에서 출판됐다.)

 12년간 신학교 생활을 마치고 1932년 12월 17일 명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윤 신부는 충북 장호원(현 감곡)본당 보좌로 사제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1년 남짓 장호원에서 지내며 「장호원 성가집」을 발간하기도 한 윤 신부는 1934년 3월 소신학교 과정인 동성상업학교 교사로 전임됐다.

 윤 신부는 교리와 라틴어를 가르치는 한편 밤 늦도록 연구 활동을 하면서 월간지 「가톨릭 청년」에 '양심' '자유' 등을 주제로 한 수필과 성서 연구 및 해설 등을 기고했고, 또다른 교회 월간지 「가톨릭 연구」에는 '호교론'에 관해 연재했다. 1936년에는 「라-한 사전」 사전을 번역, 출간해 학생들의 라틴어 공부에 많은 도움을 줬다.

 학자로서 클 가능성을 높이 본 서울교구장 라리보 주교 명으로 윤 신부는 1937년 파리로 유학을 간다. 그해 11월 소르본대에 입학한 윤 신부는 2년도 채 되지 않은 1939년 7월 「한국유교사론」으로 한국 최초 문학박사 학위를 받은 것이다.

 윤 신부가 한국 유교사를 논문 주제로 삼은 것은 다른 한편으로 일제 억압하에 있던 한국을 프랑스를 통해 국제사회에 알리려는 목적도 있었다. 윤 신부 자신이 논문 소개 글에서 "유교사상이 어떤 것인지 유교사상이 한국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모르고서는 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의 정신적 활동을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기술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실제로 윤 신부는 민족의식을 지닌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다. 학위를 마치고 파리 바오로 국제 고등학교 교원으로 잠시 지내다가 로마 라테라노 대학에서 교회법을 공부하던 윤 신부는 창씨 개명을 거부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기에 이른다. 1941년이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사진 및 기사 자료 제공=인보성체수도원
▲ 윤을수 신부(가운데)가 신학생 시절 삭발례 후에 찍은 가족 사진. 윤 신부 왼쪽이 부친이고 오른쪽이 모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