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해설

에제키엘서 해설

namsarang 2010. 2. 19. 22:35

에제키엘서는 어떤 성서인가요?

 

 이 책은 예언자 에제키엘이 말과 삶으로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적은 책이라 하여 그 예언자의 이름을 따서 ‘에제키엘’이라 했어요. 후기 예언서 중 이사야, 예레미야와 함께 분량이 많아 대예언서로 분류되지요. 에제키엘은 본래 사독 계열의 사제인 부지의 아들로 태어난 예루살렘의 사제였어요. 그 이름의 뜻은 ‘하느님은 강하시다’ 또는 ‘하느님께서 강하게 하신다’입니다. 그는 바빌로니아가 여호야긴 왕을 잡아간 일차 유배 때(기원전 598년) 바빌로나아로 끌려갔다가, 오년 후인 기원전 593년경 바빌로니아의 그발 강가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어요. 그 당시 시드키야가 다스리던 유다는 여전히 정신차리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며 이집트에 의존하며 안일하게 살고 있었어요. 이미 예루살렘에서 예레미야의 활동에 깊은 영향을 받았던 에제키엘은 예언자로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면서 아울러 하느님의 새로운 구원의 약속을 선포하였죠. 그는 기원전 571년까지 22년 동안 예언자로 활동하였답니다.

 

 

언제 누가 썼나요?

 

물론 이 예언서의 골격은 에제키엘이 전한 하느님의 말씀이죠. 아마도 그가 활동하던 시기(기원전 593-571년)에 대부분의 내용이 기록되었다고 여겨져요. 하지만 현재의 에제키엘서는 그의 정신과 사상을 잇는 일단의 사제들(에제키엘 학파)이 그의 예언을 시기별로 새롭게 배열하면서 가필하고 보완하여 편집 완성한 것이라고 추정해요. 적어도 바빌론 유배를 끝내고 돌아갈 때쯤(기원전 538년)에서는 그 꼴이 완전히 잡혀 있었을 거에요.

 

왜 쓰여졌나요?

 

에제키엘은 바빌론 유배시기를 전후하여 그 전에 활약했던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맥을 잇고 유배기 후반부에 활동했던 제2이사야보다는 앞서는 예언자입니다. 다른 동포들보다 먼저 바빌론 땅에 끌려왔던 에제키엘은 남아 있는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는 동시에 끌려온 동포들에게 야훼신앙과 희망을 안겨주어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먼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이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계명을 충실히 지키지 않는 죄 때문에 받는 하느님의 심판임을 분명히 밝혀요. 그러나 하느님은 의로우신 분이므로 의롭게 생활하면 살 길을 열어주신다고 알려주죠.

 

무엇보다도 사제이자 예언자인 에제키엘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온 세계에 미치는 그분의 절대적인 주권을 특별히 강조해요. 그분이 이스라엘을 비롯한 각 나라의 불의와 불충을 심판하시는 뜻은 당신을 알게 하여 당신께 돌아와 바르게 섬기게끔 이끄시기 위힘이었어요. 궁극적으로 그분은 새 마음을 지닌 새 백성들이 당신을 섬기는 새로운 성전, 새 세계를 이루시려는 구원의지를 강하게 지니셨죠.

오늘도 에제키엘은 대변혁기에 처한 우리에게 새롭게 각성하여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과의 계약에 충실할 것과 모든 사람과 형제적 사랑을 나눌 것을 일러주고 있어요. 하느님의 심판은 언제든지 임할 수 있으니, 새 마음과 새 정신을 갖고 새롭게 열리는 하느님 백성의 미래에 동참하라는 촉구인 셈이죠.

 

<새김과 나눔>

 

각종 유사예언들의 목청이 높은 20세기 말 현재, 미래의 모습이 어떨 것인가를 알리기보다 현재의 우리 모습을 드러내며 회개를 촉구하는 에제키엘이 전하는 말씀을 들으며, 새해에 우리가 바꾸어야 할 삶의 지세는 무엇인지 묵상합시다 ?

너 사람아 일어서라

(에제 1-24장)

 

예언자로 불림받은 에제키엘(에제 1,1-3,21)

 

에제키엘이 받아 먹은 두루마리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습니까?(2,10)

 

바빌로니아에 끌려온 지 오 년째 되는 날, 에제키엘은 놀라운 환상을 봅니다. 사람과 사자 등 네 가지 형상을 한 신비로운 존재들이 이끄는 바퀴달린 수레 위에 어떤 분의 영광이 불처럼 환하게 비쳤어요. 광야시절에 있었던 계약의 궤를 표상하는 듯한 이 수레에 계신 하느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받아 먹으라고 에제키엘에게 이르셔요.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파수꾼으로 그를 세운다고 밝히셔요. 에제키엘을 가리키는 “너 사람아”란 말의 원어는 “베네 아담”인데, ‘사람의 아들’, 곧 먼지처럼 약하고 쉽게 사라지는 허약한 인간임을 뜻해요.

 

 이스라엘의 죄와 멸망의 예언(에제 3,22-7,27)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리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6,14;7,9.27)

 에제키엘은 여러 가지 상징적인 몸짓으로 예루살렘이 포위당하고 멸망당할 운명임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멸망당하는 까닭은 우상을 섬기고 불의를 저지르는 죄 때문이지요. 이미 코앞에 닥친 그 처참한 멸망의 운명을 맛보아야 그들은 참 하느님이 야훼이심을 알게 되겠기 때문이랍니다.

 

 예루살렘의 죄와 벌을 알리는 환상과 예언(에제 8,1-19,14)

 

이스라엘 백성이 새롭게 하느님의 백성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11,17-20)

 마치 엘리야 예언자같이 에제키엘도 하느님의 기운에 이끌려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려갑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자리인 성소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르는 우상숭배와 불법의 현장을 목격해요. 아울러 그들에게 내리는 처벌도 지켜보지요. 마침내 하느님의 영광은 성전을 떠나지만 그분은 새로운 회복의 길도 일러주셔요. 예언자는 유배생활을 상징으로 보이면서, 지도자인 장로들과 거짓 예언자들의 잘못을 고발하지요. 그러면서 이 모든 죄의 책임은 개인이 지는 것이니 새 마음을 품고 새 뜻을 품으라고 권합니다. “살려느냐? 마음을 고쳐라”(18,32).

 

최후의 날은 다가오고(에제 20-24장)

 

하느님께서 이제껏 이스라엘에게 화풀이하지 않으신 까닭은 무엇입니까?(20,9.14.22)

 하느님은 출애굽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범한 죄를 낱낱이 제시합니다. 그분이 부모처럼, 약혼한 인인같이 보살폈건만, 이스라엘은 조금도 회개치 않고 우상숭배로 몸을 더럽히고 죄없는 피를 흘리는 불법을 자행해 왔어요. 그 결과 예언자의 아내의 죽음이 상징한 것처럼 이스라엘이 애타 사모하던 것들을 모두 빼앗기는 멸망의 날이 닥쳐 왔음을 알리죠.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 그 의로우신 심판 속에 치열한 구원의지도 들어 있음을 깨우쳐 준답니다.

 

야훼가 하느님이심을 알게 하리라(에제 25-48장)

 

주변 국가의 운명에 대한 예언(에제 22,1-32,32)

 

바빌론 왕이 각 나라를 치는 칼은 누구로부터 받은 것입니까?(30,25))

 이스라엘에 이어 주변에 있는 각 나라의 잘못에 대해서도 하느님의 처벌이 임합니다. 암몬과 모압, 에돔과 불레셋에 하느님의 심판이 내려요. 그런 다음 띠로에 내리는 하느님의 선고는 상당히 길죠(26,1-28,19). 반바빌론 세력의 핵심 중의 하나였던 띠로는 험준한 바윗섬 사이에 있어 난공불락을 자랑했어요. 게다가 상업도시로 유명하여 신이라도 된 양 그 부유함과 풍요로움을 뽐냈죠. 이와 같이 자신의 힘에 의지하여 교만한 띠로 역시 그것 때문에 멸망당하리라는 하느님의 심판말씀을 듣게 되어요.

 

시돈에 이어 이집트에 내리는 선고도 아주 길어요(29,1-32,32). 동방의 패권국가로 유다가 끝까지 희망을 걸었던 이집트 역시 하느님의 손길에 황폐해지고 말아요. 아마도 예루살렘의 멸망 당시에 쓰여졌으리라고 추정되는 이 대목은 세계 만방을 좌지우지하시는 하느님의 절대주권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어요. 자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믿고 그 힘을 마구 쓰는 어느 나라든지 하느님의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다는 것을 성서와 셰계사는 보여주고 있답니다. 아울러 그 심판과 처벌은 모두 참 하느님을 바로 알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음을 알려주지요(25,5;26,6;28,26;; 32,15).

 

공동체의 회복을 알리는 희망의 예언(에제 33,1-39,29)

 

마른 뼈들을 살린 것은 무엇입니까?(37,1-14)

 마침내 예루살렘은 함락되었습니다(33,21). 일찍이 하느님께서 여러 예언자들을 시켜 경고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죄인이라고 해도 죽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에 하느님은 흩어지고 허약해진 이스라엘 백성을 다시 모아 목자처럼 돌보아주고 지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착한 목자의 표상과 비교해 보세요). 그들에게 새 마움과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창조의 그 때처럼 하느님의 영은 마른 뼈들을 살리고 갈라진 두 민족을 하나로 회복시켜 주겠다고 이르셔요. 결국 하느님의 심판은 참다운 하느님의 백성공동체를 이루시려는 정화의 과정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또 하느님의 영에 힘입을 때만이 무능력하고 허약한 ‘사람의 아들’은 생명을 얻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피조물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답니다.

 

새 성전과 새 공동체(에제 40,1-48,35)

 

하느님이 세워주신 새 도읍지의 이름은 무엇입니까?(48,35)

 새로운 공동체가 하느님을 올바르게 섬길 새 성전은 왕궁이나 왕의 기념비 같은 속되고 더러운 것들과 엄격하게 분리되어 세워집니다. 또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온전하게 지키기 위한 조치들로 자세한 규정이 정해져요. 낙원에서 흘러나온 강들처럼 성전에서 솟는 샘의 환상은 하느님만이 생명의 근원이심을 입증해주어요. 하느님을 올바로 알고 바르게 섬길 때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회복시켜 주신 새로운 땅이 열두 지파에게 주어져요. 이제는 그 도읍지의 이름이 의미하듯 ‘하느님께서 여기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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