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100년전 우리는

[51] 아리랑, 일본 야욕을 경계하다

namsarang 2010. 3. 5. 19:47

[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51] 아리랑, 일본 야욕을 경계하다

 
1909. 8. 29.~1910. 8. 29.
 
                                                                                   김연갑·(사)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아라사 아차하니 미국은 밀구온다/ 일본이 일등이다 영국은 영글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소위 '아미일영(俄米日英)아리랑'이다. 러시아·미국·일본·영국이 조선을 넘보지만 결국 가장 가까이서 조선을 잘 아는 일본이 병탄할 것임을 예언한 참요(讖謠)이다. 일본은 일찍부터 아리랑의 참요적 기능을 간파하고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을 취재하러 온 '우편보지신문(郵便報知新聞)'의 레이스이(麗水)기자는 '조선 유행요'라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은 아리랑을 채록, 보고했다.

'인천 제물포 살기는 좋아도/ 왜인 등살에 나는 못살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아얼쑤 아라리-야.'

이 기사는 당시 조선의 민심을 전하고 그것을 경계하자는 글이지만, 노래를 통해 일본에 항변하려는 민중의 저항의식을 엿보게 한다. 아리랑 노래 속에 담긴 민중의 생동감은 1894년 정초 어느 날 밤, 창덕궁 뜰에서 고종과 명성황후가 박장대소하며 들었다는 광대들의 아리랑 한 수에도 담겨있는데, '매천야록'이 이를 기록하고 있다.

▲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영화의 한 장면〈큰 사진〉과 영화 포스터)

'오는길 가는길에 만나 즐거워라/ 죽으면 죽었지 헤어지기 어렵더라.'

이 아리랑 사설은 남녀의 정분을 드러냄으로써 어지러운 세상을 넘기려는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것인데, 황현은 "음란하고 비속하여 듣는 자들이 모두 얼굴을 가렸으나 명성후는 넓적다리를 치면서 '좋지 좋지' 하며 칭찬을 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렇게 아리랑은 임금 앞에서도 본색대로 불렀다. 한국인의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아리랑에 대해 미국인 '항일투사' 헐버트는 1896년 '포구의 어린아이들도 부르는 노래로, 조선인은 즉흥곡의 명수로서 바이런이나 워즈워스 못잖은 시인들'이라고 평가했다. 일본 정탐원 노부오 준페이(信夫淳平)는 조선 진출을 준비하는 이들을 위해 쓴 '한반도(韓半島)'에서 이렇게 적었다.

"노래의 음조가 얼마나 망국적이며 동시에 불가사의할 만큼 뛰어난 노래인지를 알 수 있다. 남산기슭 왜성대(倭城臺)를 거닐 때 듣는 아리랑은 애가(哀歌)로서 마치 역사의 흥폐(興廢)와 인간사의 비애를 묘사한 것 같다."

비방과 칭찬이 엇갈린 일본인의 태도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일부 한말 지식층의 아리랑 몰이해는 오히려 개탄스럽다. '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10일자는 '가곡개량(歌曲改良)의 의견(意見)'이란 제하에서 아리랑 같은 노래를 '음담한 노래로 기녀·창부가 부르는데, 망신망가망국(亡身亡家亡國)의 노래'라며 부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성토했다. 또 이듬해 11월 21일자 윤상현(尹商鉉)의 글은 '저 아리랑·영변동대 등 국가계(國歌界)에 향하여 그 완루(頑陋)를 개송하고 신사상을 수입할지어다'라고 개작을 주장했다.

하지만 춘천의 의병아리랑,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영화의 한 장면과 영화 포스터), 임시정부의 광복군아리랑 등의 족적이 시사하듯, 아리랑은 한갓 음탕한 노래가 아니라 민중의 지혜로 엮어낸 참말(眞言)이었다. 그러기에 세계인이 따라부르는 한국의 대표곡으로 살아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