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 8. 29.~1910. 8. 29.
'구 백동전은 작년 12월까지만 통용하고 그 후에는 절대적으로 금지하는 뜻을 탁지부에서 미리 고시하고 거둬들이는데 작년 12월 그믐까지 회수한 액수가 950만원 가량인데 여러 해 습관으로 인하여 아직까지 민간에서 통용하고 걷지 아니한 액수가 60만원 가량이다.'(신한민보 1910.2.16.)
1898년 전환국이 발행한 백동전을 새 화폐로 교환하는 일은 1905년 7월부터 시작되었다. 액면 2전5푼인 백동전은 금속가치가 그에 훨씬 미달하는 악화(惡貨)로, 대한제국이 주조 이익을 노려 남발함으로써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일으켰다. 대한제국은 1901년 화폐조례, 2년 후 태환금권조례를 반포해 금과 태환(兌換) 가능한 지폐를 발행코자 하였으나, 그에 필요한 금을 확보하지 못해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화폐정리사업을 통해 백동전을 회수하고 새로운 식민지 화폐제도를 수립하려 하였다. 백동전은 품질에 따라 차등 교환되었는데, 백동전 교환에 의구심을 품은 한국인은 헐값에 백동화를 방매하였기 때문에 교환이 시작되자 심각한 전황(錢荒·돈이 융통되지 않아 귀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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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동전(위)과 제일은행권 일원(아래).
'새 화폐는 모두 외국상인의 수중에 들어가고 금융이 불통하여 아무리 부상대고라 해도 물건은 있지만 매매가 절무하고, 금동(金銅) 간의 순환이 없으므로 상업을 철폐하고 도주하는 자가 분분하니, 오호라 근일 전황의 소치로 시황이 조잔하고 상업이 쇠퇴하여 일반 영업인들이 살 수 없다는 정경은 재차 보도하였거니와 연일 소문이 하도 비참하여 차마 지필로 쓸 수 없다.'(황성신문 1905.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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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 한국은행권 일환(위)과 조선은행권 일원(아래).
전황은 지방에까지 미쳐 '근일 지방에서는 전황이 우심하여 수십호 되는 동리에서 일원 돈을 구하기 극난할 뿐 아니라 지폐는 더욱 귀하여 혹 쓸 데가 있어 교환하려면 매 원에 사오 전을 더해야 한다'(대한매일신보 1909.12.15.) 하였다. 백동전과 교환된 것은 일본 민간은행인 제일은행의 은행권이었다. 교환 전 백동전 유통액은 화폐유통액의 50%를 차지하고, 엽전이 25%, 제일은행권은 15%에 불과했다. 그러나 교환이 끝나가는 1909년 말에는 화폐유통액의 절반(1234만원)이 제일은행권이고 백동전은 197만원만 남아 있었다. 바야흐로 지폐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지폐는 금태환이 불가능하였기에 신한민보는 '이렇게 허황한 종이장을 쓰는 것은 한국경제계에 크게 위태한 일'(1909.9.15.)이라 비난하였다. 지폐는 구 한국은행이 설립된 후에 한국은행권,그리고 합병 후에는 조선은행권으로 면모가 바뀌었다.
동전에서 지폐로 화폐 형태만 바뀐 것이 아니었다. 화폐단위 또한 무게단위에서 유래한 냥(兩)에서 원(圓) 또는 환(圜)으로 바뀌어 혼용되었다. 화폐 교환 전 엽전 1닢을 1푼(分), 10푼을 1전, 10전을 1냥, 10냥을 1관문이라 하였으며 5냥=1환(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새 화폐에서는 기본단위가 원이고 1원은 100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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