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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하고 나하고 눈물로 찧던 보리방아

namsarang 2010. 5. 8. 21:17

[어버이 날 ESSAY]

엄마하고 나하고 눈물로 찧던 보리방아

  • 윤 묘 희 前 MBC 드라마 전원일기 작가
윤 묘 희 前 MBC 드라마 전원일기 작가

학교는 가야 하는데 엄마와 나는 흐르는 눈물을 보태 보리방아만 찧었다
어머니는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다 그저 애가 탈 뿐이었다
춥던 겨울날 밤새 솜 넣어 누빈 명주 저고리를 보내주신 어머니
어미 잘못 만나 젖배 곯아 네 몸이 약하다던 어머니
평생 자식 걱정 하시던 그 사랑 어찌 잊으리

내 고향은 충청남도 바닷가에 있는 조그만 섬 안면도이다. 지금은 섬도 아니고 교통이 편리해졌지만, 내 어린 시절엔 교통수단이 나룻배가 전부였다.

열여섯 어린 나이에 종갓집 맏며느리로 시집오신 어머니는 제사는 물론이고 대가족의 수발까지 맡아 하셨다. 아버지 곁을 묵묵히 지키면서 평생 고된 삶을 사셨다.

맏이인 나는 내 위로 줄줄이 세 명의 삼촌이 외지에 나가서 공부를 하고 있던 터라, 그 그늘에 가려 상급학교에 진학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으레 할머니를 따라 묏뽕(가시가 달린, 일명 꾸지뽕)을 찾아 뽕자루를 이고 이 산 저 산을 숨차게 넘나들어야 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동생 업어 키우고, 어른들을 도와 낮에는 김 뜨고 밤에는 누에 밥도 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머니는 학교도 못 가고 고생만 하는 어린 딸이 안쓰럽고 가슴 아팠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억울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도 많았다.

얼마 후 나는 간단한 속옷만 챙겨 아버지 몰래 나룻배를 탔다. 어머니에게만은 서산 읍내에 있는 외가에 간다고 했다. 외사촌 언니의 도움으로 땋아 내린 긴 머리를 자르고 교복도 장만해 근처 중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니는 할머니와 아버지가 노여워하는 것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여름방학에 집에 돌아가면서 쫓겨날 각오를 했다. 아버지는 나를 보고도 말 한마디 눈길 한 번 안주셨다. 그럭저럭 한 달이 지나고 내일이 개학날이건만 아버지는 나를 학교에 보내려는 기미가 전혀 없었다. 숨소리도 한번 크게 못내는 어머니는 수중에 돈 한 푼 없었다. 안절부절못하시며 애가 타서 마른침만 삼킬 뿐이었다.

다음 날, 하루에 두 번 다니는 배가 뜰 시간이 되었다. 어머니와 나는 곱삶이 보리방아를 찧고 있었다. 모녀는 서로 쳐다보면서 울었다. 보리방아를 찧을 때는 물을 조금 치고 찧어야 하는데, 그때 우리 모녀가 흘린 눈물이 아마도 그 물을 대신하지 않았나 싶다. 마당 한편에서 김발(김을 부착시키기 위해 대나무로 엮어 만들 발)을 엮고 계시던 아버지는 여전히 모른 체하셨다.

일러스트=오어진 기자 polpm@chosun.com
나는 얼른 방에 들어가서 교복을 입고 나왔다. 그렇게라도 하면 아버지의 마음이 열릴까 싶어서였다. 그리고는 또 방아를 찧었다. 아버지가 마침내 입을 여셨다. "중핵교 까지여. 고등핵교는 꿈도 꾸지 말어, 니 삼촌들 핵비가 월마나 드는디."

조급한 손짓으로 "얼른 가라"는 어머니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나루터에 달려가 보니 이미 배는 저만치 가고 있었다.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선원 한 사람이 "(누구 집) 딸이야"라고 소리치며 배를 되돌려 다시 대 주었다. 왠지 설움이 복받쳐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뱃전에 앉아 엉엉 울었다.

그 무렵의 겨울 추위는 대단했었다. 보통 영하 20도 안팎이었으니까. 그해 겨울방학, 집에 가면 또 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외사촌들과 공부를 하고 소설책도 읽으며 외가에서 보내기로 했다.

그때 어머니가 인편으로 조그만 보따리를 보내셨다. 뜻밖에도 연둣빛 명주 저고리였다. 색깔이 참 곱고 폭신했다. 하루 종일 추운 데서 일하고 밤새워 바느질했을 어머니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저고리 속에는 고이 접힌 어머니의 편지도 한 장 들어 있었다. "이 추위에 몸이나 성하냐. 저고리를 보낸다. 솜을 두껍게 두었으니 잘 때 꼭 입고 자거라. 소매에 진 얼룩은 네 동생이 잠 깨서 울다가 지린 오줌자국이다."

여러 형제의 외사촌들과 한이불 속에서 자려니 겨우 발만 묻고 잘 때가 허다했다. 그런데 두툼한 솜저고리 덕분에 어깨와 등이 따뜻해서 행복했다.

언젠가 내가 잔병치레로 오래 고생하고 있을 때, 어머니가 내 집에 오셨다. 그때 어머니는 "열여덟 살에 너를 낳았다. 애가 애 젖 먹인다고 흉볼까봐 낮에는 시어른들 앞에서 젖도 잘 못 먹였다. 대신 할머니의 늦둥이로 태어나서 너보다 세 살 위이던 막내 삼촌에게 젖을 더 많이 먹였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어미 잘못 만나 젖배 곯아서 네 몸이 이렇게 약하다"고 말하면서 또 우셨다.

3년 전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정신은 오락가락하고 얼굴이 퉁퉁 부은 어머니를 뵈니 그 비통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만히 어머니 손을 잡았다. 어머니는 조용히 눈을 뜨고 한동안 쳐다보시다가 더듬거리며, "내 걱정은~말고, 네~몸~건사~나 잘하거라." 내게 하신 마지막 말씀이었다. 가실 때에도 자식 걱정만 하시던 어머니, 그 깊은 사랑 내 어찌 평생 잊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