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송준섭 2010 남아 월드컵
- 축구 대표팀 주치의·유나
- 이티드병원 원장
나에게 최고의 축구는 한국 대표팀이 아무런 부상도 없이 경기를 끝낼 때이다. 물론 승리의 기쁨까지 따라와 준다면 더욱 행복하다. 부상 선수가 재활에 성공해 힘차게 그라운드를 뛰는 모습은 골 장면보다 더 짜릿하다.
경기에 지는 것보다 더 가슴이 아픈 것은 부상 선수가 생기는 것이다. 상대 선수의 태클과 반칙으로 우리 선수가 그라운드에 쓰러지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대표팀 동료끼리의 훈련 과정에서도 부상이 나올 수 있어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남아공월드컵을 되돌아보면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5월 초 파주 NFC(국가대표팀 트레이닝 센터)에 30명의 예비 엔트리가 소집된 이후 선수들의 크고 작은 부상이 이어졌다.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은 오스트리아 전지훈련 때 벨라루스와의 평가전에서 무릎을 다친 곽태휘의 탈락이었다. 곽태휘는 그라운드에서 공중볼을 다투다가 쓰러져 한참이나 일어나지 못했다. "큰 부상이다"는 직감으로 뛰어가 보니 무릎이 심하게 부어 오르고 있었다. 정밀검사 결과 '월드컵 출전 불가'라는 판정을 내렸지만 곽태휘에게 그 말을 전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현지 병원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1시간 내내 침묵만 흘렀다. 곽태휘는 이튿날 아침 모든 것을 다 털어버린 듯 웃는 모습으로 식사를 했고, 모든 선수들은 그에게 위로의 말을 전해야 했다. 23명의 최종 엔트리 발표 후 곽태휘는 탈락한 3명의 귀국 인솔자가 됐다. 목발을 짚고서도 "내 축구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며 오히려 다른 선수들을 격려하고 씩씩하게 떠나는 곽태휘의 모습은 대표팀 동료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프랑스 소속팀에서 당한 허벅지 통증이 남아 있던 박주영은 허벅지 부상에서 완전히 벗어나는가 싶었는데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남아공 입성을 하루 앞두고 대표팀 동료끼리 가볍게 족구를 하다가 넘어져 왼쪽 팔꿈치가 빠진 것이다. 정신없이 달려가 관절을 끼워 맞췄지만 정형외과 전문의인 내가 봐도 통증이 상당해 보였다. "박사님,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벌써 7번째 빠진걸요."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그리스전을 엿새 앞두고 의무팀에 비상이 걸렸다. 중앙 수비수 조용형이 "왼쪽 겨드랑이와 등이 따끔거린다"고 했다. 벌레에 물린 흔적도 없는데 "가슴을 찌르는 것처럼 아프다"고 해 직관적으로 대상포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치료는 어렵지 않지만, 대상포진은 통증이 심해 훈련은 물론 경기하는 데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조기에 발견하고 적절한 약물치료와 휴식을 취한 덕에 조용형은 이내 제 컨디션을 찾았고, 탄탄한 중앙 수비로 그리스전 2대0 승리의 주역이 됐다.
16강 진출을 확정한 나이지리아와의 조별리그 3차전을 생각하면 이청용의 투혼이 먼저 떠오른다. 경기 시작한 지 몇분이 지나지 않아 이청용이 문전에서 상대 골키퍼와 충돌해 일어나지 못하는 게 아닌가.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뛰어갔더니, 이청용의 입술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정신이 없었는지 어디가 아픈지도 제대로 말도 못하는 것이었다. 이청용을 겨우 진정시키고 큰 부상은 아니니까 계속 경기를 뛰라고 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이청용의 왼쪽 무릎부터 엉덩이까지 축구화 스터드(밑창의 징) 자국이 일직선으로 남아 있었다. 가슴이 찡해져 "얼마나 아팠냐"고 물으니 말없이 씩 웃기만 했다. 스무살 갓 넘은 어린 선수들이 참으로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뼈가 부러지고, 살이 찢기고, 근육이 퉁퉁 부어오르는 고통에도 그라운드를 뛰고 있었다.
이동국은 남아공월드컵을 준비하면서 의무팀이 가장 신경을 많이 쓴 선수이다. 이동국은 지난 5월 에콰도르와의 평가전에서 오른쪽 햄스트링(허벅지 뒷근육)을 크게 다쳐 최종 엔트리에 들 확률조차 희박했다. 체외충격파 치료기 등 첨단 장비가 총동원됐고, 스스로 재활에 노력해 다행히 2주 만에 통증이 사라졌다. 가까스로 월드컵 출전 기회를 잡은 이동국은 골 맛을 보진 못했지만, 열심히 뛰었다. 이동국은 스포츠 의학적으로도 단기간에 완벽한 재활에 성공한 대표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축구 천재들과 두 달 가까이 생활하면서 배운 점이 많았다. 한국 축구를 월드컵 16강으로 끌어올린 힘은 축구 기술이 아니라 선수들의 열정과 승부욕, 팀을 위한 희생정신과 투혼이었다. 월드컵을 마친 선수들은 각자 팀으로 돌아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다시 대표팀이 소집됐을 때는 모든 선수들이 강인한 정신력과 완벽한 몸 상태로 만나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