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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고 사라지는 방송 역사

namsarang 2010. 9. 3. 23:54

[동아광장/윤석민]

 

지워지고 사라지는 방송 역사

 



 

 

힘들고 짜증스러운 날이 이어지더니 급기야 그제와 어제는 강력한 태풍이 전국을 강타했다. 억지로라도 분위기 좀 바꿔보자. 올해 들어 즐거웠던 일 중에 월드컵만 한 게 또 있을까. 사상 첫 원정 16강! 기억만으로도 다시금 엔도르핀이 솟구친다. 그 경기를 우리는 민영방송 SBS를 통해 지켜보았다. 방송사 간의 협상이 무산되면서 KBS와 MBC는 결국 단 한 경기도 중계하지 못했다. 이들은 그 대신 ‘어제 뉴스’꼴로 2002년 및 2006년 월드컵 경기를 편성했다. 축구의 열기가 한창이던 어느 날, 퇴근길에 우연히 다이얼을 맞춘 한 라디오 토론 프로그램에 남아공 현지에 있어야 할 양 방송사의 유명 축구해설위원이 모여 있었다. ‘픽’ 하는 실소를 금할 수 없었지만 당사자들의 속내는 어떠했을지.

당연히 SBS의 월드컵 독점중계의 타당성을 둘러싸고 격한 공방이 있었다. 여기서 그 논쟁을 되풀이할 의도는 없다. 필자가 관심 있는 건 주장들이 아니라 사실(fact)이다. 이런 일엔 항상 주장들만 난무할 뿐 실질적 데이터는 없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직접 연구를 해보기로 했다. SBS가 겨울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초대형 스포츠 이벤트를 독점하기 이전 이후 전체 방송 편성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해보는 게 그 요체다. 그런데 이게 생각처럼 만만한 작업이 아니다. 방송 채널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편성자료 보관하는 기관 없어

 

우리 국민 중 90% 이상이 수십, 수백 채널을 제공하는 케이블 위성 인터넷TV(IPTV)를 통해 TV를 본다. 지상파방송사들만 하더라도 메인채널 외에 스포츠 드라마 오락 골프 등 다수의 채널을 운영한다. SBS의 월드컵 독점편성은 SBS스포츠 등 자사의 채널은 물론이고 경쟁관계에 있는 KBS와 MBC의 채널 편성을 뒤흔들었을 것이다. 지상파 프로그램들은 다시금 다수의 유료방송 채널로 확산된다. 인기 프로그램의 경우 5∼8개의 채널에서 동시 재방되기도 한다. 결국 SBS 독점중계의 파장은 일파만파 수십 개의 방송 채널로 퍼져갔을 것이다. 따라서 이 연쇄반응을 정확히 살피려면 과거부터 현재까지 지상파, 지상파 파생채널, 그리고 그 영향권에 있는 유료방송 채널을 모두 검토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이 작업을 수행하지 못했다. 이러한 방송 채널들에 대한 종합적 편성운영 자료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전파진흥원 콘텐츠진흥원 케이블협회, 그 어떤 정부기관 내지 유관단체도 2001년 이후의 자료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일간신문의 TV 프로그램안내 역시 지상파 채널을 제외하곤 몇몇 핵심 프로그램 중심의 약식 편성표를 제공할 뿐이다.

전화통을 잡고 끙끙대기를 한나절, 우리나라 어느 곳에도 제대로 된 종합적 방송편성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졌다.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필자의 연구가 문제가 아니었다. 지난 10여 년간 우리 방송의 가장 중요하고도 기초적인 자료가 망실()되어 온 것이다. 금번 SBS의 월드컵 단독중계처럼 영향력 있는 지상파 방송사의 행위가 전체 방송 편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방송법령에 명시된 다양한 편성 규제가 사업자들에 의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 근본적으로 몇 년 몇 월 며칠에 국민들에게 어떤 방송이 제공됐는지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사태가 이리 된 이유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없지 않다. 2001년에 유료방송채널의 시장 진입이 자유화되었다. 이후 하루가 멀게 수많은 방송 채널이 명멸했다. 이들 채널의 편성운영 자료를 그날그날 수합하는 일은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다. 차일피일하는 사이 관련 조직이 개편되고 책임자가 바뀌며 과제 자체가 실종됐을 것이다.

이제라도 지체없이 수집해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방송 역사는 시시각각 지워지고 있다. 방송연구자랍시고 뒤늦게 문제를 파악한 필자 역시 자괴감에 석고대죄라도 하고픈 심정이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는가. 망양보뢰()라는 말처럼 늦게라도 우리를 고치는 수밖에. 우선 현재 방영 중인 채널들에 대한 편성운영 자료를 지체 없이 수집해야 한다. 문제는 망실된 자료의 복원이다. 각 방송사업자가 3년 치 사업자료를 보관한다고 치면 문제가 되는 건 2001년부터 2007년의 자료일 터. 이를 찾아내려면 각 방송사 편성 실무자의 하드디스크를 일일이 뒤지는 지겹고 고단한 수작업을 거쳐야 할 것이다. 반드시 협력할 의무가 없는 사업자들에게 아쉬운 부탁을 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하루라도 이 일이 늦어지면 자료 복구는 그만큼 어려워질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태만 탓에 사라지고 있는 게 방송의 역사뿐일까. 이런저런 상념 끝에 다시 마음이 답답해지는 요즘이다.

윤석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younsm@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