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윤석민]
국민의 볼 권리가 우선이다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는 합종연횡(合從連衡)의 전국시대(戰國時代). 요즘 방송판만큼 이 말이 걸맞은 예가 또 있을까. 얼마 전까지 월드컵 중계권을 두고 겁나게 싸우던 지상파 방송사들이었다. 이들이 동맹을 맺어 케이블과의 전면전에 돌입했다. 지상파 채널 재전송 대가를 내라는 것이다.
다툼은 시장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 지상파 방송을 지상파로 계속 볼 수 있었다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하루가 멀게 촘촘히 들어서는 건물들이 전파를 가로막았다. 다세대주택의 지상파 공시청설비는 관리소홀로 대개 무용지물이다. 뒤늦게 지상파 수신환경 개선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그 성과는 미지수다. 결국 지상파는 케이블에 의존해 난시청을 해소하고 매출도 늘려온 셈이다. 케이블 가입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지상파 채널의 재전송은 케이블 측에서도 남는 장사였다. 그러기에 복잡한 계산을 ‘퉁’치며 공생해 온 게 얼마 전까지 일이었다.
거대한 방송 전쟁의 예고편
재전송료 요구에 케이블은 강력히 반발했고 급기야 법정다툼으로 이어졌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1부는 9월 8일, 케이블의 지상파 디지털방송 재송신은 지상파의 동시중계방송권 침해라며 사실상 지상파 손을 들어주었다. 결론을 미리 제시하면 이 판결은 잘못됐다.
이 송사를 담당한 재판부가 공정한 판결을 위해 고심했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판결문에 밝힌 지상파의 저작권법상의 권리 및 그 침해 여부, 케이블 측의 반론에 대한 검토는 신중하고도 타당했다. 방송사의 저작권과 간접강제청구는 인정하지 않되 동시중계방송권 침해를 인정한 논리도 정당했다. 하지만 문제는 “재전송을 중단하라”는 주문이다.
“대가를 지불하든지 아니면 서비스 제공을 중단하라.” 여느 서비스라면 합당하기 그지없는 판결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서비스가 지상파 방송이고, 그 전송수단이 사실상 케이블로 국한된다는 점이다. 국민들이 뉴스, 정보, 오락을 얻는 일차적 수단인 지상파 방송이 중단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우리의 눈과 귀가 잠시도 가려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기에 판결은 다음과 같았어야 했다. “케이블 재전송은 지상파의 동시중계방송권 침해에 해당하나, 지상파가 국민 삶에 지니는 막중함을 고려하여 지상파의 재전송 중단 요구는 수용하지 아니한다.”
실제로 판결 이후 케이블 업계는 전국 1500만 케이블 가입가구에 대한 지상파 재전송 중단 절차에 돌입했다. 일단 지상파 광고송출을 중단하고 조만간 본 프로그램까지 막겠다고 한다. 기가 막히지만 어쩌겠는가. 형식상 법원 판결을 준수하고 있으니. 판결 이후 원만한 협의를 예상했던 재판부의 기대와 달리 미래의 불확실한 이익에도 양보 없이 다투는 이들이다. 당장의 금전적 이해가 달린 사안을 두고 양측은 결코 쉽게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방통위 적극 중재로 위상 높여야
어찌 보면 애초에 이 문제를 소송으로 풀려 한 시도 자체가 잘못이었다. 방송 사업자들이 사적다툼의 법리적 해결 차원에서 이를 법원에 가져가기에 앞서, 방송정책 당국인 방송통신위원회는 시청자 및 사회의 관점에서 재전송 정책판단을 내렸어야 했다. 소송이 벌어져도 이러한 공익적 판단이 자신의 사익을 과도하게 침해한다고 느끼는 측이 국가를 상대로 소를 거는 게 옳다. 법정의 지혜는 이때 제대로 빛을 발할 것이다.
이번 재전송문제의 법원판결은 방통위 입장에서 존립 근거를 부정당한 사건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번에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PD수첩이 촉발시킨 촛불시위, 미디어관계법 파동, 월드컵 독점중계권 분쟁 등 온 나라가 홍역을 앓던 일련의 방송사태 속에 방통위는 없었다. 판결 이후 방통위가 적극적 중재에 나서 그나마 다행이다. 늦었다 싶을 때가 가장 이른 때다. 이번 지상파-케이블 재전송 문제는 그간 무사안일 했던 방통위 위상 재정립의 시험대가 될 것이다.
더 큰 관점에서 이 다툼은 향후 방송판에서 전개될 거대한 전쟁의 예고편에 불과하다. 곧 도입될 종합편성채널과 종래의 지상파 방송, 케이블, 인터넷TV, 스마트TV, 그리고 디지털 지상파 다채널방송(MMS) 간의 충돌이 코앞에 닥쳤다. 이번 사태를 교훈삼아 방통위는 급변하는 방송환경에 부합하는 종합적 정책청사진(grand plan)을 마련해 향후 불거질 유사한 문제들에 대처해야 한다.
지상파와 케이블도 공정한 재전송 정책 방안이 수립되기 전까지 무책임한 힘 대결을 중단해야 한다. 시청자를 볼모로 삼는 이전투구는 종국엔 양자 모두의 발등을 찍게 될 것이다. 시청률 1∼2%도 넘기 힘든 유료방송 채널의 한계를 극복하고 14%라는 경이적 시청률로 금요일 밤을 평정한 ‘슈퍼스타K’를 보라. 이처럼 콘텐츠 경쟁에서 이기는 게 진정한 승부다. 시청자의 환호와 갈채가 함께 함은 물론이다.
윤석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younsm@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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