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이런일 저런일

이정희 민노당 대표의 ‘無言선언’

namsarang 2010. 10. 29. 22:27

[동아광장/윤석민]

 

이정희 민노당 대표의선언’

 

 

2년 전 여름, 한 학회 행사차 금강산에 다녀왔다. 박왕자 씨 피살사건으로 관광이 폐쇄되기 불과 며칠 전이었다. ‘절대 어설픈 감상에 빠지지 않으리라.’ 필자의 다짐이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누구의 주제런가…’란 노래 한 자락에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자신을 알기 때문이었다.

번듯한 우리 측 출입사무소(CIQ), 삼엄한 양측의 군사분계선 게이트, 천막으로 얼기설기 지어진 북측 CIQ를 거쳐 북한 땅에 들어섰다. 황토 흙냄새, 낯설지 않은 산하, 북한 경비병의 앳된 모습에 가슴이 싸했다. 하지만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되씹었다. “냉정하자.” 금강산의 연봉들이 황혼에 어슴푸레 사라져가던 시간, 관광단지 내 주점에 일행들이 둘러앉아 닭구이 안주에 들쭉술을 돌릴 때도 주문처럼 되뇌었다. “감상 불가!”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내금강 만폭동으로 가는 버스의 안내원이 필자의 노력을 무위로 만들었다. 창백하다 못해 파리한 안색이었다. 가는 팔로 힘겹게 버티고 선 그녀의 가녀린 몸은 작은 충격에도 꺾어질 듯 흔들렸다. 20대 후반쯤 되었을까. 하지만 몸은 초등생이었다. 먹지 못한 몸이었다. 그녀가 던지는 우스갯소리에 일행은 잘도 웃었지만 필자는 하나도 우습지 않았다.

금강산 ‘꽃 파는 처녀’의 충격

 

필자가 대학원을 마치고 유학을 준비하던 1980년대 후반, 이념적 해빙기를 맞아 금서로 묶여있던 각종 사회과학 서적이며 문학 작품들이 풀려나왔다. ‘꽃 파는 처녀’를 읽었던 건 그때쯤이다. 참으로 아름다운 운문체의 문장에 젖어, 일제와 지주의 악랄함에 치를 떨며 그녀에게 빠졌었다. 그런 나의 사랑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참담한 모습으로 꽃을 팔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날 밤 들쭉술에 만취해 기어이 그토록 그리던 그 땅의 바닥에 몸을 갈았던 이유였다.

이렇듯 나약한 ‘대북 감상주의’에 허우적대는 필자이기에 그처럼 충격이 컸는지 모르겠다. “날선 언어로 북의 3대 권력세습을 비판하는 행렬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의 선언 말이다. 세습에 대한 민노당의 애매한 입장을 질타한 한 언론 매체의 사설에 대한 답글에서였다. 필자의 오랜 로망인 비정하리만큼 냉철한 현실 판단과 쇠줄처럼 강한 인내로 무장한 이념투사가 거기 있었다. 물론 그 주장의 옳고 그름은 별도로 따져 볼 문제지만….


글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북의 권력구조를 비판하면 남북관계는 급속히 악화된다. 북의 권력구조에 대한 입장과 남북관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남북관계가 평화와 화해로 나가려면 북의 권력자에 대해 반박하고 싶어도 아예 말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 그렇기에 북의 권력승계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나와 민노당의 판단이다.”

결론만 놓고 보면 기막힌 이 주장이 영 터무니없는 것만은 아니다. 북의 권력은 남과의 긴장과 대치 위에 존립한다. 그녀의 표현을 빌리면 이 양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세습적 권력 이양의 과도기인 향후 몇 년간 더욱 그러할 터다. 여기에 남한과 미국의 대선, 중국 공산당의 리더십 변동, 김일성 탄생 100주년이 겹쳐 있다. 이 격변기를 북은 한층 강한 긴장과 대치로 돌파하려 할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그 어떤 생트집의 빌미도 주지 않게 세습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삼가고 향후 그 새파란 지도자를 웃는 낯으로 대면할 날을 대비해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일지 모른다.

이렇듯 북의 권력세습을 비판하지 않겠다는 그녀의 주장을 견강부회()가 됐건 뭐가 됐건 수용한다 치자. 그렇다면 금번 그녀의 글은 과연 무엇인가. 말하지 않겠다는 말은 논리적 모순이다. 우리는 소통하지 않을 수 없다(One cannot not communicate). 입을 다물고 있어도 그 자체로 “나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 전달된다. 결국 이정희 대표의 ‘말하지 않겠다는 말’은 “어떤 말과 논리로 3대세습의 체제를 옹호할 것인가? NL주사파가 다수인 친북정당 당수의 입장에서조차 북의 권력승계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는 자가당착의 비판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의 숨은 뜻은 양심의 분노?

냉정한 프로페셔널 정치인으로서 ‘남북관계의 현실’을 무엇보다 우선시하는 자신의 논리를 충실히 따르자면 그녀는 비판으로 읽힐 수밖에 없는 ‘무언() 선언’ 대신 다음과 같은 정치적 레토릭을 구사했어야 했다. “김일성 주석에서 김정일 위원장, 다시 김정은 대장으로의 권력 승계를 축하한다. 그것은 세습이 아니라 주체적 강성대국의 꿈을 실현하고자 하는 역사적 목표와 사명의 이양이라고 나는 본다.”

차마 이렇게 말하지 못한 그녀는 결국 추악한 권력세습에 대한 양심의 분노를 어쩌지 못한 또 하나의 연약한 ‘감상주의자’였던 거다.

                                                                                                              윤석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언론정보학

                                                                                                               /  younsm@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