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
“목욕하면 흑사병…” 중세엔 왕도 잘 안씻었다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캐서린 애셴버그 지/박수철 옮김/320쪽/1만5000원·예지
“나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을 씻어야 했습니다. 먼지가 너무 많이 묻었거든요.” 1705년 프랑스 팔라틴 공주는 한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단지 세수를 한 것이 화제가 되다니. 고개를 갸웃거릴 법도 하지만 목욕을 금기시했던 18세기 초 유럽에서는 놀라운 일이었다.
역사에서 목욕과 청결에 대한 개념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이 책은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부터 중세 유럽,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역사 속에 녹아있는 목욕 문화를 들췄다.
“로마는 목욕 때문에 멸망했다”는 역사가 기번의 말처럼 로마인의 목욕 사랑은 유별났다. 목욕탕은 가운데 목욕 구역을 중심으로 집회실, 도서관, 강연장 등으로 구성된 거대한 규모였다. 당시에는 사람들은 만나면 “어느 목욕탕에 다니느냐”고 묻는 게 예사였다. 반면 ‘영혼의 정결’을 중시한 기독교인들은 로마식 목욕이 쾌락주의와 관계가 깊다고 보고 목욕을 하지 않았다.
엄청난 인기를 끌던 목욕탕이 사라진 것은 14세기 중반 유럽인 3명 중 1명의 목숨을 앗아간 흑사병의 영향이 컸다. 당시 의사와 과학자들은 뜨거운 물에 들어가 모공이 열리면 역병이 쉽게 침투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역병이 돌 때마다 “죽기 싫으면 목욕탕과 목욕을 피하시오”란 말이 나왔고, 18세기 초까지 유럽인들은 목욕과는 담을 쌓았다.
유럽이 위생 문제에 허덕일 때 미국은 목욕 문화를 이끌었다. 드넓은 땅에 넉넉한 배관시설을 갖춘 미국은 개인위생 관리에 노력을 기울였다. 학교에서 아이들의 위생 상태를 검사하기 시작했고 비누와 세제산업이 발달했다. 구취와 발 냄새 등 몸에서 나는 냄새는 해고와 이혼의 사유가 됐고, 여성들은 체취를 감추기 위해 겨드랑이 털을 밀고 방취제를 바르게 됐다.
청결이 강조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우리는 향긋한 휴지와 치약을 쓰고, 사람을 집에 초대할 때 공기청정제와 향수를 뿌려 냄새를 없앤다. 하얀 치아를 갖기 위해 미백제를 쓰고 잘 씻지 않는 사람들은 모자라거나 천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냄새가 사람을 구별하고 차별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사랑스러운 장미향은 이제 그만”이라고 말한다. 청결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인간의 면역체계를 약화시켜 질병을 증가시켰다는 분석도 이어진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오늘날의 물 부족 현상이 앞으로의 목욕 습관에 끼칠 영향을 살펴봤다. 저자는 “베일에 싸여 있지만 1세기 뒤 사람들은 오늘날의 청결 습관을 보며 재미있어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강은지 기자 kej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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