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윤종구]
독도-센카쿠-쿠릴의 공통점
청일전쟁으로 동북아시아가 아수라장이었던 1895년 1월 14일. 일본은 각료회의를 열어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를 오키나와(沖繩) 현에 편입했다. 영토 편입 과정은 치밀했다. 각료회의는 먼저 “센카쿠 열도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한다”고 밝힌 후 “센카쿠를 일본국 오키나와 현 이시가키(石垣) 시 소속으로 한다”고 결정했다. 센카쿠를 ‘내 땅’이라고 공언하는 나라가 없다는 이유로 이 결정을 주변국에 알리지도 않았다.
중국은 이 섬이 명·청나라에 조공을 바쳐온 중국 영토라고 주장하지만 당시 중국에 조공을 바치지 않은 나라가 드물었다는 점에서 이를 영유권의 근거라고 보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거나 근대 국제법에 일찍 눈뜬 일본이 재빨리 영토 공식화를 한 것이다. 중국은 1970년대 초 센카쿠 해역에 천연자원이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본격적으로 ‘내 땅’이라며 영유권 분쟁에 나섰다. 일본은 ‘센카쿠엔 영토 분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이번 사태로 중국은 센카쿠가 분쟁지역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데엔 성공한 듯하다. 다만 세계 각국에 대(對)중국 경계경보가 내려지는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 득실 계산엔 논란도 있다. 여하튼 현실은 일본이 센카쿠를 실효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센카쿠 분쟁이 한창이던 9월 27일 일본을 새파랗게 질리게 한 소식이 있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조만간 쿠릴 열도 남단 4개 섬(일본명 북방영토)을 방문할 것이라는 보도였다. 방문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일본은 한때 중국과 러시아의 영유권 협공에 몰리는 것 아니냐며 바짝 긴장했다. 이 섬은 일본과 러시아가 영유권 다툼을 벌이는 곳이다. 구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항복을 불과 일주일 앞둔 1945년 8월 8일 대일(對日) 선전포고를 하고 군대를 남하시킨 공으로 쿠릴 열도 남단을 접수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소련 영유권을 인정했다.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지만 ‘소련이 참전 시늉만 하고 쿠릴 열도를 먹었다’는 시각도 있다. 일본은 ‘북방영토 담당 각료’를 별도로 둘 정도로 애착이 강하지만 현실은 러시아의 실효지배다.
독도는 어떤가. 러일전쟁 와중이던 1905년 1월 28일 일본은 각료회의를 열어 독도를 시마네(島根) 현에 귀속시켰다. 당시 대한제국은 나라가 망해 가는 통에 작은 섬 하나에 신경 쓸 여유도 능력도 없었다. 우리 선조들이 근대 국제법이 뭔지, 외교가 뭔지 문외한이던 때에 일본은 영유권의 법적 근거를 짜 맞추는 작업에 공을 들인 것이다. 아직도 독도와 다케시마(竹島·독도의 일본식 이름)를 병행 표기하는 세계지도가 많다. 한때의 어리석음의 결과는 그만큼 크다. 다행히 한국은 광복 후 독도를 되찾았지만 ‘독도가 역사적으로나 국제법적으로나 우리 땅’이라는 증빙 자료를 모으고 논리적 무장에 나선 것은 그 후 한참 뒤의 일이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에서 우린 너무 오랫동안 안이했다.
센카쿠, 쿠릴, 독도에는 공통점이 있다. 근대 세상에 일찍 눈떴던 일본이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한다는 점과 어리바리하면 당한다, 지역 정세가 지극히 불안정해지면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누군가 땅 욕심을 낸다는 점이다. 북한이 위화도와 황금평을 중국에 초장기간 임대했다는 말도 들린다. 동북아시아 정세는 언제 급변할지 아무도 모를 정도로 불안정 요인이 상존한다. 100년 전의 무능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와 능력을 부단히 점검할 일이다.
윤종구 도쿄특파원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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