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 함흥 오가던 길목… '양문大臣' 전설도
의정부에서 축석고개를 넘어 포천을 지나 강원도 철원으로 이어지는 주요 간선도로인 43번 국도는 조선시대에 '북관대로(北關大路)'라고 불렸던 도로가 원형이다. 북관대로는 한양에서 북동 방면으로 원산, 경흥 등 함경도 지역을 연결하던 교통로였다. 43번 국도 포천시 신북면과 영중면의 경계를 이루는 명덕천에는 '만세교(萬歲橋)'라는 교량이 자리잡고 있다. 또 만세교 남쪽 신북면에는 만세교에서 유래한 '만세교리'라는 마을도 있다.
만세교라는 이름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포천문화원이 발간한 '포천 지명유래집'을 보면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함흥을 오가면서 이 다리를 지났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일제 치하 3·1 운동 당시 만세를 부른 곳이어서 생긴 이름이라는 얘기도 있으나 나중에 갖다붙인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도 만세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정보원의 '한국 지명유래집'에 따르면 조선 영조 당시 편찬한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영평현의 남쪽 10리, 포천현의 북쪽 20리 북관대로에 만세교가 있다'는 내용이 있다.
만세교에는 조선 후기 4대 문장가로 꼽혔던 이서구(李書九·1757~1825)와 관련된 전설도 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입신해 정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고 순조 때에는 이조판서, 형조판서, 우의정까지 올랐다. 관직을 물러나 만년에 지금의 포천시 영중면 양문리에서 은거하고 있을 때 '양문대신'으로 불리며 백성들의 신망을 두루 받았다. 지금도 이 지역에는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이서구가 만세교 근처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을 때 어떤 젊은 선비가 강을 건너게 됐다. 그는 체면에 발을 걷을 수 없어 업어서 건네달라고 부탁했고, 이서구는 선선히 청을 들어줬다. 마침 해가 저물어 젊은이는 양문리에서 유숙하게 됐고, 자기를 업었던 노인이 대신을 지낸 것을 알고 백배사죄했다. 이서구는 너그럽게 용서하고 허물을 빨리 고치면 대성할 수 있다는 충고를 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