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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민주주의에서 성찰적 민주주의로

namsarang 2011. 1. 4. 23:49
[동아광장/함재봉]

 

                          참여민주주의에서 성찰적 민주주의로

 

 

 한국 정치의 숙원이자 과제는 민주화였다. 민주화라 함은 국민이 정치 과정에 직접 참여하여 지도자를 손수 뽑는 절차를 뜻하였다. 권위주의 전통, 식민지배, 독재를 경험한 국민으로서 정치참여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죽 정치참여를 갈망했으면 노무현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를 아예 ‘참여정부’라고 명명했을까. 그 결과 오늘날 한국 정치는 참여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했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국회의원 도지사 시장 구청장 시의원 구의원 그리고 교육감까지 모조리 직접투표로 뽑는다. 대학에서는 대학 총장마저 직접투표로 선출하는 실정이다.

이뿐 아니다. 지도자를 직접 선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제는 여론 형성과정 자체에 국민이 깊숙이,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각종 비정부기구(NGO)와 시민단체를 통해서,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서 활발히, 적극적으로 국정의 각 부문에 대해 의견을 쏟아내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조직적인 정치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언론의 자유와 세계 최고의 인터넷망을 매개로 대한민국의 국민은 어느 나라 국민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민 사이에서는 여전히 정치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고, 정치인은 가장 인기 없는 직종이며 정치는 한국의 가장 후진적인 분야로 늘 지목받는다. 왜 그럴까. 민주주의의 완성이 참여 그 자체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히틀러도 국민지지 높았지만

참여가 보장된 상황에서 국민이 정치에 어떤 형태로 참여하느냐는 민주주의를 만개시킬 수도, 고사시킬 수도 있다. 독일 국민들은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서 히틀러를 직접 뽑았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포퓰리즘의 대명사이며 나라를 도탄에 빠뜨린 ‘페로니즘’의 창시자인 후안 페론을 압도적인 표차로 직접 당선시켰다. 만일 오늘 중동에서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된다면 대부분의 경우에 헤즈볼라, 알카에다, 탈레반 등의 극단주의를 표방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

 

민주주의의 고민은 여기에 있다. 모두의 참여가 보장되면서 특정 집단의 이익과 견해만을 대변하거나 포퓰리즘에 빠진다면 자국민과 이웃 국가에 엄청난 해악을 끼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민주주의 자체도 붕괴할 수밖에 없다. 좌익에서는 ‘민중’을 우상시하면서 민중의 뜻이면 무엇이든 도덕적이고 역사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군중에게 정치를 맡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위험한가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에서 근대 민주주의 이론가들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공통으로 고민해온 문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폭민정치, 즉 다수의 난폭한 폭민이 이끄는 정치라 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우정치, 즉 다수의 어리석은 민중이 이끄는 정치라고 하였다. 미국 민주주의 최고의 이론가인 제임스 매디슨은 “순수민주주의는 당파의 해악을 치유할 방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민주주의는 개인의 안녕이나 재산권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라고까지 하였다.

순수민주주의의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매디슨이 내놓은 것이 대의민주주의였다. 군중을 대표하는 대의원이 숙의(deliberation)를 통해 군중의 뜻을 정제하고 확대하는 역할을 해줄 때 비로소 지속가능한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매디슨이 말하는 순수민주주의, 즉 직접민주주의의 해악을 많이 경험하였다. 근거 없는 악성 루머에 민주적으로 갓 선출된 정부가 휘청거리는 것을 ‘광우병 촛불시위’를 통해서 경험했고 몰지각한 누리꾼의 악의적이고 집요한 행동이 개인의 사생활을 얼마나 철저하게 파괴할 수 있는지를 ‘타진요’ 사건을 통해서 봤다.

군중심리와 참여를 혼동 말아야

그렇다고 인터넷을 닫아버릴 수도 없고 이미 국민과 누리꾼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정치참여에 대한 욕구를 거부할 수도 없다. 또, 고등교육의 보편화와 통신기술의 발달, 정보사회의 도래로 국민 개개인의 정보수집 능력은 물론이고 분석능력 역시 정부나 다른 공식기관들에 비해 손색이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국민과 누리꾼 개개인이 정보수집이나 분석 능력 그리고 참여도에서만 세계 최고 수준을 구가할 것이 아니라 숙의와 성찰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이 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대의원에게 맡겼던 숙의과정, 즉 정제되지 않은 대중의 ‘순수한 의사’를 국가와 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형태로 재구성하는 과정에 국민과 누리꾼들이 직접 참여해야 한다. 참여민주주의가 포퓰리즘이 아닌 성찰적 민주주의로 승화될 때 대한민국은 진정한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