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窓)/이런일 저런일

섣달 그믐의 온정

namsarang 2011. 1. 29. 16:57

[작가 박상우의 그림 읽기]

 

섣달 그믐의 온정

 

 

               성협, 고기굽기

 

딸아이의 고집으로 김 과장은 설 명절 전날 동네 홀몸노인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인 아이가 홀몸노인을 돕는 모임에 가입하고 난 뒤부터 주말마다 봉사활동을 하러 다닌 건 1년쯤 전부터였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하는데 공부는 열심히 안 하고 외부활동에 마음을 쏟는 게 은근히 걱정스러웠는데 이제는 자신에게 함께 홀몸노인을 찾아가자고 하니 뭔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을 돕는 것도 좋지만 제 앞가림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그래서 김 과장은 부드러운 어조로 아이를 타일렀습니다. “이 다음에 사회인으로 자리 잡고 난 뒤에 남을 도와도 얼마든지 도울 수 있단다. 넌 지금 그런 일에 정신을 팔 게 아니라 한창 공부에 몰입해야 할 때 아니냐?” 그러자 아이가 사뭇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이렇게 응대했습니다. “아빠는 사회인으로 자리 잡은 지 아주 오래됐는데도 남을 돕는 일에는 전혀 관심 없잖아?”

아이를 따라 찾아간 홀몸노인의 반지하방에는 등이 굽은 팔순 노파가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인사를 하자 합죽한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노파는 팔을 벌려 아이를 안았습니다. 친할머니와 손녀처럼 오순도순 대화를 주고받는 걸로 보아 알고 지낸 지가 꽤 된 것 같았습니다. 그제야 김 과장은 오래전에 세상 떠난 부모님을 떠올리며 망연한 표정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우리 아빠예요” 하고 아이가 김 과장을 소개하자 노파가 그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그러고는 “내 손녀 잘 키워줘서 고마워” 하며 천진스러운 표정으로 웃었습니다. 그 말에 동화돼 김 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할머니, 뭐가 제일 드시고 싶으세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파가 방싯 웃으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습니다. “고기가 제일 먹고 싶어. 숯불에 구운 고기 말이야. 난 이가 없으니까 씹지도 않고 막 먹을 수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김 과장은 딸아이에게 “내일 고기 사서 할머니 집 다시 가자”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딸아이가 밝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아빠, 그건 할머니 유머야. 진짜 고기가 드시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냐.” 순간 김 과장과 딸아이는 커다란 소리를 내며 함께 웃었습니다.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길에서 기이하게 마음이 열리는 걸 느끼며 김 과장은 아이의 손을 힘주어 잡았습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은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관의 도리를 일깨운 ‘목민심서’를 저술했습니다. 그 책에서 다산은 “섣달그믐날 이틀 전에 노인들에게 음식물을 돌린다. 80세 이상 된 노인에게는 각각 쌀 한 말과 고기 두 근을 보내드리고, 90세 이상 된 노인에게는 고치떡, 약과, 마른 꿩 같은 진귀한 반찬 두 접시를 더 보내드린다. 생각해 보라. 큰 고을이라 하더라도 80세 이상 된 노인은 불과 수십 명일 것이고 90세 이상 된 노인은 몇 명에 불과할 것이며, 소용되는 쌀은 두어 섬에 고기도 60근에 불과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쓰기 어려운 비용이겠는가?”라며 소외된 노인을 배려하고 공경하라고 일깨웠습니다. 지금 우리 모두 배불리 먹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같지만 주변에는 아직도 헐벗고 굶주리며 외로움에 지쳐가는 이웃이 많습니다.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의 온정, 억만금의 기부금보다 더 값진 나눔이고 더 깊은 어울림입니다.

                                                                                                                                                                                                                박상우 작가